이동식 링거 거치대를 밀면서1층 야외 병원 로비를 몇 바퀴 돌았다.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산책이다. 수백 번 넘게 세탁해서 병원 로고가 희미한 환자복을 입고, 링거 걸이를 끌며달달달 요란한 소음을 발생시키면서 꿋꿋하게 걸었다. 먹은 걸 잘 소화시키고, 다리도 좀 움직이고, 햇살을 받고 싶었다.5일 동안 충실히 앓았다. 수액을 맞고, 매 식사 후 약을 한 움큼씩 삼키고, 수포를 소독하고. 이제 적당히 회복해서 곧 퇴원이다. 왼쪽 뺨과 목에 남은 수포 자국은 아직 선명해서 속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낫는다고 한다. 처방받은 항바이러스 연고를 열심히 발라야겠다.
로비를 빙글빙글 걸으면서 머릿돌을 발견하고는 놀랐다. 이 병원 건물은 무려 1980년에 지어진 것이었다. 어쩐지, 건물 내부는 많이 낡아있다. 화장실 정도만 리모델링 되어있고, 병실에 있는 가구와 소품들은 레트로 그 자체이다.어느 정도냐하면, 환자 베드에 각도를 조절하는 리모컨이 없어서 등받이를 세우려면 침대 발치에 쪼그리고 앉아 손잡이를 잡고 열심히 돌려야 한다. 혼자 쓰게 된 2인실 병실에 누워서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수많은 환자들이 앓으며 스쳐갔은 이 공간의 역사를 헤아려보았다. 40년 넘는 세월 동안 몇 명이나 다녀갔을까. 그들에게 이곳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을까. 아득하다.
Goldstar 전화기, 작동은 잘 되는듯 하다
오늘은 내 소중한 지인들이 나를 보기 위해 오전과 오후, 두 차례 병원을 방문했다. 나와 같은 학교에 근무했었거나, 현재 함께 근무 중인 나의 선배교사들이다. 오전에 오신 분은 어제에 이어 오늘 또 방문하셨다. "요 근처에 약속 왔다가 너 심심할까 봐 또 들렀지~" 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감동받아 울뻔했다. 반갑고 기쁘고 고맙고 사랑스러워서 감개가 무량했다. 나는 원래 쉽게 감동하는 편인데, 몸이 쇠약해져서인지 감동이 더 격하게 밀려왔다.평소에 매달 1회 독서모임에서 겨우 얼굴을 보곤 하는 우리는, 아픈 와중에 자주 만나니이것은 참 좋고 기쁜 일이라며 서로 마주 보고 30분 동안 신나게 떠들었다. 오늘 하루 중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다.
선배의 선물
반 아이들 생각을 매일 한다.원래 계획상 오늘 6교시는 우리 반에서 다 같이 햄버거 파티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미리 지출품의도 올려놓았는데, 내가 출근을 못해서 카드결제를 못하는 상황. 아쉬워할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라서, 어젯밤에는 우리 반 전원에게 콘 아이스크림 기프티콘을 전송했다. "오늘도 학교 갔다 오느라 공부하느라 수고했지?"라는 메시지와 함께 보냈는데, 쿠폰을 받자마자 아이들의 답장이 마구 밀려왔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동이에요... 어서 나으세요... 선생님이 없으니 너무 허전해요... 잘 먹겠습니다. 쾌차하십시오....'
단톡방에서는몹시 무뚝뚝한 아이들인데, 개인 톡으로는 이토록 다정스럽다니,심각하게놀라웠다. 아이들의 톡에 하나하나 답을 하다 보니 대화는 계속 이어졌고, 두세 시간이 훌쩍 흘렀다. 사실, 교실에서는 내향적인 아이들과의 대화가부족하다.우리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해 준 아이스크림 쿠폰에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시간이 더 있다면 한 명 한 명에게 편지를 써주고 싶었다. 마음을 다잡고, 평소에 내가 관찰했던 것과 해주고 싶던 말들을요약해서 톡을 보냈다. '선생님이 이렇게 저를 생각해 주시는지 몰랐습니다, 감사해요'라는 진심 어린 말들이 우수수 돌아왔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깊은 농도로 채워지는느낌이었다.
돌이켜보니, 나는 매일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서 핸드폰을 거의 쳐다보지 못했다. 나에게 있어서 학교에서의 퇴근은 곧바로집이라는 일터로의 출근이니까. 육아와 집안 일라는거대한 일상에서 내가 잠시벗어나 있다는 것이 실감 나서 생소했다.
일상은 내 컨디션을 기다려주지 않으니, 스스로 나의 에너지를 잘 나눠 써야 한다는 걸 안다.눈앞에 닥친 학교 일정들과 집에 산적해있을 집안일을 떠올리면 솔직히, 다 회피하고 도망가고 싶다. 마치 수많은 사람들과 나란히 일정한 속도로 러닝머신 위에서 뛰다가 나만 잠시 내려온 듯. 그리고 내일 다시 그 러닝머신 위로 올라가서 가열차게 뛰어야 하는상황에 놓인 것 같다.평소에심신의 평화를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면서도, 나는 이토록 자주 스스로 무너지고쉽게 고갈된다.더 낙관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홀로 낯선 곳에 머물며, 머릿속을 떠다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구축해 온 세계, 지금 내가 서 있는 곳, 나의 천성, 나의 욕망, 산다는 것의 본질, 내 직업의 쓸모, 인생의 모호함,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러다가 이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글로 쓸 수 있는 시간-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다는 걸 깨닫고는 새삼 감사하고 기뻤다.병실에서 노트북을 켜고 매일 뭔가를 썼다. 평소에는 쓰고 싶은 욕구가 들어도 행동할시간과 여력이 없다.집에서는 주로 아이들을 케어하느라, 맥락이 툭툭 끊기고, 문장은 도저히 이어지지가 않는다. 내 노트북과 핸드폰 메모장에는 쓰다만 글들이 빨랫감처럼 여기저기 내동댕이 쳐져있다. 아무래도 나는 뭔가를 쓸 때 내가 더 깊어지고 풍성해진다고 느끼는 편인데, 그런 나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여기머무르는 동안,곳곳에 조각나 있던 생각의 파편들을 끄집어 모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