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학교 일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 Francia Jun 28. 2022

칭찬의 쓸모


올해 고2 수업을 메인으로, 고3서브 맡아서 들어가는 중이다. 3학년 수업은 사실상 'EBS 수능특강'이 주교재인데, 분량이 많아서 쫓기는 듯하다. 2학년 수업에서는 교과서를 다룬다. 교과서 지문은 길이가 꽤 길지만 내용이 나름 재밌다. 글의 구성 문장의 구조도 (수능영어에 비해) 친절해서 읽을 만하다. 이번 2학년 1학기 ‘영어Ⅰ’ 과목에서는 총 2회의 학생 발표수업을 기획했다.


원활한 발표수업을 위해서는 사전작업이 필요하다. 먼저 그룹을 만들. 발표에 있어서 영어 능력이 어느 정도 요하므로 과목 성취도 상. 중. 하. 에 해당하는 구성원이 골고루 포함되도록 조를 구성했다. 간혹 너무 친한 친구들이 같은 조가 되면 슬쩍 분리시키고, 내향인 혹은 외향인들로만 구성된 그룹 다른 성향의 제삼자와 바꿔 넣어주었다. 그다음, 교과서 본문을 적절한 분량으로 나누어 그룹별로 할당한다. 3-4명 정도로 구성된 각 그룹은 할당된 글을 읽고 분석하여 완전히 이해한 후, 친구들 앞에서 설명을 한다. 추가 발표 자료는 글의 이해에 도움이 될 만한 배경지식 혹은 영문법(어법) 지식을 정리한 ppt 슬라이드이다.    

 

이 수업의 기획 의도는 단연 학생의 주도적 참여이다.

전달해야 할 지식의 양과 효율성을 고려했을 때, 학생중심 수업방식을 선택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인문계 고등학교의 고2 영어 수업 교실 분위기는 대체로 경직되어 있다. 아이들은 고1을 겪으며 영어 지문의 난이도가 갑작스레 높아지는 것을 체감하고 학습량에 부담감을 느낀다. 또한, 대학 입시가 점점 다가오면서 교실에는 내신 등급과 수능 영어영역 등급이 공고히 굳어지는 듯한 중압감이 존재한다. 게다가 지난 2년 동안 코로나의 여파로 수업결손이 심각했고, 그로 인한 ‘중위권 상실’ 현상이 우리 학교에도 명백히 나타났다. 다시 말해, 소수의 성적 상위권 학생들을 제외한 대다수가 영어 수업에 더욱 무관심해지고 있는 상황. 이런 교실에서 세상 지루한 얼굴로 앉아있는 아이들과 마주하며 나절감을 느꼈다. 아이들을 재우고 싶지 않았다. 뭔가 다른 수업 방식이 필요했다.


처음 발표를 시작하던 날, 나는 내심 실망했다. 발표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학생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발표는 점수로 수치화하지 않기로 했기에 (즉 수행평가에 포함되지 않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던 것 같기도 하다.(평가에 포함시키려면 추가로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많아서 이번엔 안 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나름대로 열심히 발표 준비를 해 온 아이들이 있었고, 잘하려는 의욕이 있지만 기술과 능력이 부족한 친구들도 있었다. 이들은 경험 부족한 경우였다. 하지만 교과서를  반복해서 공부하고, 자료 조사를 하고,  ppt를 만들어서 그걸 가지고 전자칠판 앞에 서서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해내는 이 아이들이 그저 너무 기특했다. 성의가 부족했던 팀에게 쓴소리를 하고 싶은 마음을 고이 접어두고, 하나라도 칭찬할 만한 점들을 찾아내서 칭찬과 격려를 해 주었다.



00야, 너는 발표 자세가 너무 훌륭하다. 듣는 사람이 화면이 안보일까 봐 옆으로 비껴 서서 판서하는 거, 그거 쉽지 않은데 정말 잘했다. 수고했어!    

아니, 00이 목소리가 이렇게 좋은지 전혀 몰랐네! 톤이 좋고, 발음도 또박또박하고, 목소리 크기와 속도도 아주 적절하고. 듣는 사람이 엄청 편안했어. 혹시 꿈이 아나운서니? ㅎㅎ    

00은 듣는 사람과 계속 아이 컨택하면서 발표한 점이 훌륭하다. 듣는 사람들이 잘 이해하고 있는지, 질문은 없는지 묻고 넘어간 부분은 특히 사려 깊다. 잘했다.

와, 00가 만든 ppt 템플릿은 너무 귀엽네, 또 애니메이션 효과가 화려해서 시선을 사로잡는데?! 이런 능력이 있는 줄 몰랐네. ppt 만드느라 밤샜을 것 같은데, 진짜 잘했다. 덕분에 우리가 즐거웠어, 애썼다.



발표를 시작하기 전, 특히 긴장한 학생들에게는 더 큰 박수를 유도하면서 서로 격려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신기하게도 다음 차시부터 발표 분위기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프레젠테이션 퀄리티가 눈에 띄게 향상되었고, 발표하는 자세도 훨씬 진지해졌다. 누군가는 본문 설명을 심하게 완벽하게 하길래 감탄하며 준비과정 물어봤더니, 어떤 일타강사의 강의를 여러 번 보고 따라 했다고 고백했다. 그의 노력이 가상해서 또 칭찬을 퍼부어주었다.


이토록 철저하게 준비하다니! 너의 열정이 대단하고 감동적이다.. 혹시 flawless라는 단어를 들어보았니? 오늘 네 발표가 바로 그랬어.
애썼고. 고맙고, 기특하다. 잘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아무도 안 잤다. 발표하는 친구들을 난감하게 만들려고 서로서로 질문을 마구 던졌다. 어떤 질문은 너무 말도 안 되거나 웃겨서 교실에 웃음이 마구 터졌다. 무기력해 보이던 아이들에게서 충만한 의욕을 발견했다. 강의식 수업에서는 목소리 한 번을 듣기 어려웠던 과묵한 아이들이 발표  보달변가였다. 반대로 평소에 교실에 제일 말 많던 아이가 막상 무대공포증이라며 덜덜 떨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의 몰랐던 모습을 발견하 즐거웠고 누군가의 잠재력을 확인하며 서로 감탄했다. 가장 좋았던 부분은 평소에 영어에(혹은 영어성적에) 1도 관심 없어 보이던 아이들이 자기가 속한 그룹에 를 끼치지 않으려고 사소한 부분이라도 맡아서 자기 역할을 해내는 것이었다. 발표를 위해서 그룹원들이 서로 소통하고, 돕고 연대하는 모습이 다 들여다 보여서 나는 진심 기뻤다. 아이들이 등급을 잘 받으려고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아니라서 행복했다.




2회 차 발표는 1회 차 때보다 한결 수준이 높아졌다. 새 단원에서 새 그룹을 구성하여 발표를 했는데, 이번엔 누구와 같은 그룹이 될 것인가에 관한 궁금증도 기대 요소인 듯했다. 앞선 발표 경험을 바탕으로 전반적인 아웃풋이 훌륭했다. 나의 피드백을 반영하여 부족한 점이 나아지는 것이 뚜렷해서 기특했다. 대다수 아이들의 발표 자세도 훨씬 여유로워졌고 자연스러워졌다. 발표수업이 끝나고 받은 소감문에 자주 쓰여있는 말은 ‘다음 발표 때에는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더 잘하고 싶다’였다. 다음 발표는 계획에 없는데.. 다른 것을 또 구상해보아야겠다.


내 직업은 누군가의 장점을 찾아내서 아낌없이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나의 사소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한줄기 빛이 될 수도 있다고 믿어왔다. 그것은 내가 학창 시절에 직접 겪어서 알고 있는 사실이다.


부족한 점과 보완해야 할 점도 있지만, 수업시간에 아이들을 재우지 않아서 성공이다. 내가 입원해서 잠시 발표수업이 중단되었을 때, '선생님, 저희 조 발표 준비했는데, 선생님 오시면 이어서 하는 거죠?'라고 톡을 보낸 아이 덕분에 병실에서 웃었다. 교실에서 학생들이 뭔가 배우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많이 벅찼다. 그리고 생기부에 교과세특에 적어 줄 거리들을 많이 건져서 다행이다. 2학기 땐 또 어떤 재미있는 수업을 할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올해 첫 모의고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