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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Aug 16. 2022

결혼이라는 극단적 헌신

타자의 절대적 다름을 인정하는 일


스피노자의 말 ‘모든 불행과 정신적 고뇌의 원인은 정신이 물질에 대한 애착과 결부되어 있고 불가능한 것을 가지려고 하는 데서 비롯된다’되뇐다. 지나친 확언이나 과도한 확신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는 편이므로 위의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 역시 첫 단어 ‘모든’에서 흠칫했지만, 이 문장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만 ‘물질에 대한 애착’에서 ‘물질’의 범주가 무엇까지 포괄하는지(물성을 가진 인간을 넘어서 시간, 사고방식, 이념 등의 추상적 개념까지 해당되는지)와 ‘불가능한 것’이라는 표현이 내포하는 주관적인 영역을 어느 지점까지 상정할 수 있는지가 모호해서 때로는 정신적 고뇌가 심화되기도 한다. 어찌 됐든. 불행과 정신적 고뇌로 고통받을 때마다 스피노자 선생님의 문장은 나를 돌아보게 하는 방식으로 위안을 준다.

써보자면 끝도 없이 쓸 수 있을 것 같은 주제인 ‘결혼’이라는 단어를 겁도 없이 제목에 집어넣은 채로 이 글을 쓰고 있다. ‘극단적’이라는 강렬한 형용사와 ‘헌신’이라는 무거운 명사를 나열하고, 불행과 정신적 고뇌라는 말을 이어서 갖다 붙였다. 나에게 결혼은 그러한 것이기에.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결합하여 가족이 되는 과정. 나는 여기서 ‘서로 다른’이라는 부분에 방점을 찍고 싶다. 나의 경우를 포함하여 주위를 널리 둘러봐도, 서로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결합보다 그 반대의 경우가 빈번하다(애초에 ‘나와 유사한 타인’이 존재하긴 할까 싶다).



다르므로, 서로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부딪히게 되고,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물론 객관적으로 둘 중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잘못으로 인해 갈등이 생길 수도 있지만(‘유책사유’라는 말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부부간에 발생하는 대부분의 갈등을 들여다보면 두 사람 사이의 입장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어느 한쪽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저 두 사람(혹은 양쪽의 원가족)이 너무 다르고, 그 절대적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싸우는 것이랄까.


수많은 기혼자들로부터 지극히 개인적인 그들만의 부부싸움에 관해 들어왔다. 처음에는 ‘세상에 그런 남편이, 아내가, 혹은 인간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진심으로 화자와 함께 흥분했지만, 이제는 내심 화자의 배우자 입장을 기준으로 상황을 가늠해보곤 한다. ‘상대방 그(그녀)도 힘든 부분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보통은 내색하지 않고 화자의 편을 들긴 한다.



피붙이를 향한 내리사랑이라는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서도 갈등이 존재하는 마당에, 하물며 완전한 타자와의 관계에서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의아한 상황 아닌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대체 왜 결혼들을 하는가. (나는 왜 했는가.. 에 대해서는 다음에 쓰는 걸로..)

그렇다면 ‘타자의 절대적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 그것은 가능한 일인가. 간혹 브런치에서 마주치는(읽으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결혼하길 참 잘했다’ 류의 글을 쓰시는 작가님들이 바로 그런 경지에 오른 분들인가.




나는 갈등 상황에 직면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성향이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적극적 액션을 취하는 물리적 방도에 서툴어서 홀로 내적으로 힘들 때가 잦다. 특히 내가 사랑하고 애정 하는 가족들과의 갈등 내지 싸움은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이므로, 주로 스스로를 독려하곤 한다. 다름을 인정하려고 노력하고, 그게 잘 안되면 나의 주장과 욕구를 내려놓고, 내가 헌신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렇게 뭔가를 끄적이면서 마음을 다스린다.





“선생님, 결혼은 꼭 해야 하는 걸까요?”라고 거듭 묻는 학생이 있었다. “글쎄, 그건 개인의 선택이겠지. 최근에는 비혼이 대세인 것 같긴 한데, 모든 게 그렇든 결혼도 장단점이 있겠지요?” 정도로 대답했던 것 같다. 선생이라는 직업 때문에 내 안에는 중립적인 말, 긍정적인 말, 교육적인 말을 해줘야 한다는 다소간의 압박감이 필터처럼 존재한다. 때로는 그 필터를 모두 제거해버리고 날 것의 말을 해주고 싶다.

“결혼? 웬만하면, 아니 절대 하지 마. 혹시라도 극단적으로 헌신하고 싶으면, 그럼 해.”




나는 지금 상당히 시니컬한데, 동시에 뭔가 꽤 시원하다. 밤에 쓰는 편지처럼, 내일이면 많이 부끄러울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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