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La Francia
Sep 01. 2022
강한 의지와 굳은 정신력만으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다는 말에 온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무릇 신체가 정신을 지배한다고 믿는다. 니체는 ‘그 어떤 심오한 철학보다 더 큰 지혜가 육체에 담겨있다’ 고 했다. 이슬아 작가의 ‘체력이 인품’이라는 말에 격하게 공감한다. 이러한 믿음이 더욱 굳건하게 자리 잡은 건 4년간의 육아휴직 동안이었다. ‘산후우울증’이라는 단어로 일축되는 여러 증상으로 고통받던 시절, 나를 살린 건 다름 아닌 운동이었다.
내 삶의 전환점은 출산과 육아부터였다. 미혼과 기혼 사이에도 엄청난 간극이 있지만, 무자녀 상태의 기혼 생활과 유자녀 상태의 기혼 생활 사이에는 우주적 거리가 존재한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연년생 자매를 낳은 이후로 내 심신이 총체적으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잠은 무한정 부족했고, 육체는 늘 지쳐있었고, 아기가 사랑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나의 마음은 헛헛하고 갑갑했다. 남편도 육아에 헌신했지만, 회사일로 바빴고 대체로 귀가가 늦었다. 육체는 쇠약해지고 정신은 무기력해졌다.
둘째 출산 후 3개월 차 되는 시점부터 요가를 다시 시작했다. 요가는 20대 초반부터 꾸준히 해왔던 운동이기에 익숙했다. 몸의 컨디션이 점차 회복되자 달리기와 필라테스를 추가하여 운동량을 늘려나갔다. 체력이 점점 상승했고 몸의 피로도는 줄어들었으며, 기분이 나아졌다. 운동하며 땀을 흘릴 때면 내 안에 깊이 침잠해있던 억압, 불만, 자학 등 온갖 번민이 함께 배출되는 듯 상쾌했다. 3킬로 러닝으로 시작해 1년 후에는 10킬로를 쉼 없이 뛸 수 있게 되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튀어나올 듯 뛸 때 육체의 엄연함을 느꼈다. 휴대폰 배터리가 충전돼 듯 내가 충전되는 것 같았다.
운동이 일상이 스며들면서 육아하는 틈틈이 몸을 움직였다. 아기가 낮잠 자는 동안에 요가를 하고, 아이가 혼자서 뭔가에 집중하며 놀 때 스쿼트와 버피, 플랭크와 런지 따위를 한 세트씩 했다. 운동방을 만들어서 요가매트를 상시 펼쳐놓고는 아사나를 연습했다. 필라테스 센터를 오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바렐이라는 기구도 운동방에 들였다. 20대 때보다 체력이 좋아졌다. 아니 살면서 가장 건강했던 시절이었다.
연년생 두 딸을 키우는 전업주부의 일상은 하루의 90프로 이상을 ‘엄마’ 역할로 사는 것이었다. 두 아이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쉼 없이 움직여야 했으므로, 무엇보다 체력이 필요했다. 체력이 충만하면 쉽게 지치지 않았고, 아이들에게 더욱 상냥한 엄마가 될 수 있었다.
일방적인 돌봄 제공자 역할에 지칠 때, 내 안의 무언가가 소진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라지고 있는 건 내 자아였다. 자아가 완전히 고갈되기 전에 스스로를 돌봐 주는 방식의 일환으로 나는 운동을 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나면 책을 읽었다. 그 행위를 통해 내 육체와 영혼이 상승되는 것을 느꼈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만 같았다.
복직한 첫해에는 애써서 운동에 매진했다. 운동하던 습관이 남아 있어서 가능했던 것 같다. 몸이 피곤하지만 운동을 안 하면 그 피로감이 더했으므로 웬만하면 건너뛰지 않았다. 퇴근길에 어린이집에 들러서 아이들을 데리고 귀가하는 즉시 환복 후 요가매트에 올라갔다. 다운 독, 업 독 같은 단순해 보이는 자세가 몸을 어찌나 상쾌하게 해 주는지. 그렇게 종일 직장에서 버티느라 경직된 몸을 조금이라도 풀고 나면 저녁 식사 준비를 할 힘이 났다. 달리기도 꾸준히 했다. 저녁을 간단히 먹고, 꼬박꼬박 강변으로 러닝을 하러 나갔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휴직 기간에 비해서 운동하는 시간은 자꾸 줄어들었다.
당연히,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내가 옆에서 도와줘야 할 유치원 숙제도 늘어갔다. 학교에서 못다 한 일을 집에 가져와서 하는 날들도 늘어갔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피트니스 센터에 개인 피티를 등록했다. 운 좋게도 나와 잘 맞는 코치님을 만나서 꽤 즐겁게 운동했다. 웨이트 기구 다루는 법, 올바른 자세와 식단 같은 것들을 열심히 배웠다. 매달 인바디를 측정할 때 미세하게나마 근육량이 늘어나는 게 신기하고 보람찼다.
하지만 내 개인적 사정 때문에 미리 예약된 1대 1 수업을 취소하거나 미루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내가 센터에 가기 위해서는 남편이 회사에서 칼퇴해 아이들을 맡아주어야만 했는데, 그의 회사에는 갑작스러운 미팅이나 회식이 잦았다. “오늘 일이 생겨서 수업에 참석 못해요. 죄송합니다.” 는 식의 문자를 보내야 할 때마다 트레이너 선생님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결국 내가 그만두겠다고(정확히는 잠시 쉬겠다고, 여건이 나아지면 돌아오겠다고) 했다. 10개월가량의 웨이트 수업이 그렇게 끝났다. 몹시 아쉬웠다.
복직 3년 째인 올해, 1학기가 시작하자마자 나는 코로나에 확진되어 앓았고, 얼마 전에는 대상포진으로 입원했었다. 섭취하는 영양소의 밸런스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운동에 대한 열정만 많았다는 결론에 이르렀고(정작 그 열정만큼 운동은 하지도 못했으면서), 반성했다. 내 몸에게 많이 미안했다. 푹 쉬고 잘 먹어서 회복해야겠다는 생각에 한동안 그저 열심히 먹었다. 쇠약해진 몸의 기능을 되찾기 위해 각종 건강보조제를 섭취했고, 엄마가 보내준 홍삼도 꼬박꼬박 먹었다. 덕분에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그런데 갈수록 몸을 움직이기가 귀찮아졌고 하염없이 나태해졌다.
운동에 대한 의지가 크게 꺾였다. 운동이라는 궤도에서 완전히 이탈한 듯했다. 예전에는 퇴근 후 아무리 피곤해도 운동을 했지만, 이제는 피곤하니까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다. 손가락 하나를 까딱하고 싶지 않은데 달리기와 웨이트가 웬 말이냐며. 업무와 집안일로 인한 피로도는 갈수록 높아지고, 두통과 소화불량에 증상에 자주 시달렸다.
사태의 핵심을 파악한 두어 달 전, 나는 다소 즉흥적으로 요가 수업을 수강 신청했다. 요가 수업에 참석하기 위해 남편에게 화요일 목요일은 일찍 귀가해 달라고 부탁, 아니 요구했다. 내가 살아야 아이들이 살고, 우리 가족이 사는 것이라고 격앙된 어조로 설득했다(너무 비장해서 좀 무섭게 들렸을 것이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주 2회 수업 중 1회만 참석하더라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규칙적으로 운동하러 다닌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었기에.
다시 시작한 요가는.. 역시 좋았다. 요가를 하는 동안 여실히 깨달았다. 내가 이걸 왜 그토록 좋아했었는지.
침묵의 공간에서 내 몸의 감각에 집중하고 내 숨을 자각하는 일. 일상에서 쓰지 않는 근육을 꼼꼼하게 늘리고, 비틀고, 자극하여 발달시키는 일. 코어를 단단하게 하고 마음을 유연하게 하는 일.
수련 막바지에 사바아사나를 하는 그 짧은 몇 분간은 고밀도로 달콤해서 그대로 아침까지 잠들고 싶었다. 깊은 이완 상태에서 오는 편안함과 안락함을 온몸으로 감각했다. 요가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가기 전의 피곤함이 있던 자리가 새로운 에너지로 채워진 것을 느낀다. 몸이 가뿐하고 마음은 평온하다. 십수 년 전 처음 요가를 만났을 때 내가 평생 소속되어야 하는 세계를 발견했다고 느꼈었는데, 그 마음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걸 발견하자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
주 1~2회 50분간의 요가 수련. 그 움직임은 사소하지만, 그것의 파장은 굉장하다. 자꾸 몸을 움직이고 싶고, 다른 운동도 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최근에는 달리기 3킬로를 다시 시작했고, 근력운동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자잘한 성취감들이 켜켜이 쌓여서 자기 효능감이 커진다.
덜 피곤하니 더 친절하고, 뭔가를 할 때 더 활기차다. 이 감각을 기억하고, 운동 궤도에 다시 진입해서 나를 그 관성 위에 올려두기로 다짐한다.
잘 산다는 건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 친하게 지내는 삶이라고 했다. 나를 더 자주 들여다보고, 더 잘 보살펴줘야 하니까 운동을 하자. 언젠가 또 무한정 나태해지면 잊지 말고 이 글을 다시 읽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