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La Francia
Sep 01. 2022
식탁 의자에 앉은 채로 창밖을 쳐다보면 바로 내 눈높이에 나무들이 보인다. 창문을 열어 놓으면 우리 집 앞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꽤 또렷하게 들린다. 그것들이 주는 묘한 안정감이 있다. 혹여나 여기서 떨어져도 죽지는 않겠구나.
예전 집은 고층에서 멀리 내려다보는 뷰가 장관이었다. 하지만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땅을 쳐다볼 때면 아찔하기도 했다. 생과 사의 경계는 다름 아닌 이 베란다 난간이로구나. 위태롭기도 하지. 그런 맥락에서 지금은, 언제든지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요인이 한 가지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사실에 안도하다가, 또 의아하다.
왜 그런 생각을 했냐 하면, 최근에 이어령 선생님의 책을 다시 읽어서이다. 죽음은 한낮의 따사로운 햇살 정중앙에 존재한다고 했던가. 메멘토 모리. 그 책은 찬란한 순간에 머물수록 동시에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라고 했다.
죽음을 생각하면 현실에 매달리거나 발목 잡히지 않을 수 있다. 죽음을 떠올리면,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선택하기가 조금 쉬워진다. 미적분에서 사칙연산 정도로 문제가 심플해진다. 죽음을 항상 곁에 두라는 말이 차츰 이해가 되는 걸 보니, 나이를 제대로 먹고 있나 보다.
죽음을 자신의 일이 아닌 듯 여기는 존재들과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10대 후반의 아이들에게 서른, 마흔, 그 이후는 까마득하다. 그들은 삶이 지루할 만큼 긴 시간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10대에 누군들 그러지 않았겠는가. 나이가 들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뚜렷해지는 걸 보니, 나는 제대로 늙고 있나 보다.
되돌아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애늙은이 소리를 듣고 자랐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의 애청자였다. 또래 중엔 흔치 않은 pc통신 유저였고, 그 파란 화면 속 세계에서 라디오 DJ에게 사연을 쓰거나, 라디오 동호회 사람들과 채팅을 했다. 심지어 오프라인 모임에도 참석했는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대다수는 대학생 언니들이었다. 친절하고 상냥했던 그 언니들은 막내가 왔다며 몹시 다정히 대해 주었다. 그런 식으로 나는 늘 또래들보다 연상의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러고 보니 지금 학교에서 친한 선생님들의 모임에서도 나는 막내이다. 인생을 아주 일관되게 살고 있는 듯하다.
죽음을 생각하면 내 앞의 학생들이, 내 어린 시절이 절절히 소중하다. 어린 시절은 그저 철없고, 모르는 것 투성이인데다가, 너무 슬프고, 신나고, 아프고, 즐겁고, 흥분되고, 좌절스럽고, 화나고, 애틋하고, 막막하고, 극적이다. 어릴 때는 어른이 되면 삶이 반짝거릴 줄 알았는데, 정작 별똥별처럼 빛나는 건 어린 시절이다. 내 학생들이, 내 아이들이 그걸 알면 좋겠다. 그리고 더 자주 행복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가끔 연락한다. 그들이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우리들의 어린 시절이 실존했음을 상호 증명한다. 그 시절에 일기를 더 써놓을 걸 그랬다. 사진을 더 찍어놓을 걸 그랬다. 찬란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동시에 죽음을 떠올린다. 내 옆에 잠든 아이의 매끄러운 발바닥을 매만지는 지금 이 순간, 나는 나름대로 잘 살고 있는 것 같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