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삶이 끝나도 괜찮을 것 같은 순간들이 있다. 그런 찰나는 흔치 않다. 감정이 극심하게 고양된 채, 세속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듯한 순간.
최근에는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탱고를 듣다가 그런 걸 느꼈다.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님이 연주하는 아스트로 피아졸라의 <café 1930>이라는 곡의 중반부였다. 연신 묵직하고 구슬프게 흐르는 단조의 선율이 톤업되면서 반전이 일어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단순히 음에서 양으로의 전환이 아니다. 말하자면 환희와 유사한 정서인데, 베토벤식의 극적 환희가 아니라 여전히 깊은 슬픔에 몸을 담그고 있는 채로 맞는 극적인 ‘애환’이다. 아련하고, 그윽하고, 간곡하고, 절절하다. 그러다가 다시 단조로 돌아간다. 나는 그 순간에 잠시 포박당했다. (음악을 잘 모르지만 때때로 어떤 곡을 듣다가 어떤 지점에서 감정이 고조되고, 곧잘 운다.) 그 음악을 들으며 빨간 신호등에 정차하고 있을 때, 굵은 빗방울이 차 지붕 위로 후드득. 세차게 떨어지고 있었다.
알고리즘이 연결해준 다음 곡은 영화 <여인의 향기>의 탱고였다. 알 파치노가 낯선 여인과 탱고를 추는 장면. 이 명장면은 영화의 줄거리를 전혀 모른 채로 봐도 무척 아름답지만, 영화 전체를 감상하고 나면 그 탱고의 여운이 어마어마하다. 극 중에서 퇴역 장교이자 시각장애인인 알 파치노는 삶에 회의를 느끼고 스스로 죽고자 한다. 뉴욕에 가서 자살할 생각으로 그곳에 간다. 어떤 식당에 들어가고, 거기서 우연히 처음 본 여인과 탱고를 추게 된다. 시야가 차단된 상황에서도 그는 당당하고 태연하다. 자연스럽게 탱고를 리드하는 그의 움직임을 자세히 보면 미세한 떨림과 극도의 긴장감과 감격스러움에 가까운 희열감이 뚜렷하다. 그는 아마도 ‘이제 정말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참을 더 울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때, 자신을 숨기느라 잃어버린 것들을 마주한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본연을 목도하고는 통증에 가까운 놀라움을 느낀다. 그냥 ‘오롯한 나’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 순간은 뭐랄까, 그 어떤 것에 대한 집착이나 걱정, 미련, 아쉬움 등이 증발하면서 극도로 자유로워지면서, ‘그냥 이대로 죽어도 될 것 같아’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말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 그런 강렬한 무드가 있다.
다시 <여인의 향기>로 돌아가서.
알 파치노는 결국 자살하지 않는다. 그는 아마도 어떤 시점에 죽지 않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영화는 알 파치노가 타인을 위해 결정적인 일을 인상적으로 해내면서 마무리된다. 나는, 차에서 잠깐 느꼈던 그 극심한 감정을 금세 잊어버렸다. 현실의 일상은 오차 없이 견고하고 우리의 감정은 지체 없이 휘발된다. 유치원에 도착해서는 눈물을 닦고, 거울을 한 번 보고, 평소처럼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백영옥 작가는 ‘사는 건 상처를, 굴욕을, 멀어지는 꿈을 감당해내는 일이다’라고 했다. 상처도 굴욕도 멀어지는 꿈도 다 맞는 말이지만, 사는 건 가끔 본연의 나를 감당해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도 오늘은 꽤 성공적이다. 순간적인 감정을 그대로 놓치지 않고, 그걸로 이렇게 글을 써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