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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Sep 26. 2022

우리는 좀 더 예민해져도 된다

최소한 이것에 관해서

1.

초등학교 시절, '아이스께끼'라는 짓궂고 못된 짓이 유행했었다. 여자아이들의 치마를 들추는 경악스러운 행위가 그저 장난으로 치부되던 시절이었다. 같은 반 남자아이에게 그걸 당하고 민망하고 속상하고 화나고 짜증 나고 분노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주위에 있던 어른들은 그 애들을 전혀 심각하지 않은 방식으로 야단쳤다. 집에 와서 그 얘길 했더니 어른들은 '아이고, 걔가 너 좋아하나 보다'라고 했다.



2.

대학 때 친했던 내 친구는 헤어진 남자 친구 때문에 괴로워했다. 친구의 전남친은 이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애 앞에 자꾸 나타났다. 그는 전여친의 캠퍼스 내 동선을 다 알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식당 앞에 도착하면 그가 먹을 걸 사들고 서 있거나, 도서관에 가면 홀연히 나타나서 그 애에게 '자리를 미리 잡아놨으니 내 옆에 앉아'라고 말했다. 당시 우리는 여럿이 몰려다녔는데, 그때마다 부러운 마음에 그 애를 놀렸다. 우리들 중 누군가는 "야, 저렇게 노력하는데 그냥 좀 받아줘라~ ", "너한테 저렇게 지극정성인 남자가 또 나타날 것 같냐? 그냥 못 이기는 척 만나~"와 비슷한 말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친구는 정색하며 이제 진짜 그만하라고 했고, 그날부터 우리는 그 애를 놀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문제의  전남친도 그 애 앞에 나타나는 것을 그만두었는지, 그건 잘 기억이 안 난다.



3.

십여 년 전, 신규로 발령받아서 근무하 학교에서 사건이 있었다. 중3 남학생들이 수업 중 디지털카메라로 내 치마 속을 촬영했고, 그걸 여럿이서 공유한 일이 누군가의 신고로 드러난 것이다. 사건 당일 나는 무릎 아래 길이의 플레어 치마를 입고 있었고, 개별학습 도중  아이 책상 옆에 서서 뭔가 설명을 해주던 중이었다. 뒤쪽에서 한 아이가 내 발밑으로 카메라를 들이밀어 소리 없이 신속하게 사진을 찍었고, 나는 그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며칠 뒤, 어떤 학생이 나에게 그 일을 귀띔해주었을 때, 나는 심장이 굳는 것 같았고 두 손이 마구 떨렸다. 극도의 충격으로 인해 정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교감선생님은 인상을 쓰며 "아이고 그 노무 시키들," 하는 말로 시작해서 아이들을 비난하는 듯하더니, "아~들이 젊고 예쁜 여선생님 보고 정신을 못 차리고 마... 그 나이 때 머스마들이 호기심이 왕성하다 아인교, " 식으로 이어갔다. "그러니까 여들이 치마 입을 때는 특히 조심해야 됩니더, 아니, 아예 치마를 안입어야되~," 라며 미간을 찌푸리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는 나에게 '그 애들을 어떻게 해줬으면 하냐'라고, '애들이 징계받기를 바라느냐'라고 물었다.




 

위의 세 가지 사례 속에 등장하는 제삼자들의 반응에는, '성인지 감수성'이 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처음으로 이 단어를 검색해보았다.)

성인지 감수성(gender sensitivity):
성별 간의 불균형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갖춰 일상생활 속에서의 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해 내는 민감성을 말하며, 법조계에서는 성범죄 사건 등 관련 사건을 심리할 때 피해자가 처한 상황의 맥락과 눈높이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출처: 네이버 시사상식사전


내가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건 비교적 최근이다. 3년 전 복직을 했더니 직장 내 성추행에 관한 설문조사, 성 비위 사건의 보도 등의 공문이 눈에 띄었고, 관련 연수가 이루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이 용어는 1995년에 처음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 중반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이 개념의 핵심은 바로 피해자가 처한 상황의 맥락과 눈높이에서 사건을 본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정작 당사자의 마음 상태에 무심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사례 2와 특히 연관 지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유독 누군가에 대한 호감, 애정, 사랑이라는 감정에 관대한 것 같다. '왜긴, 좋아서 그러지.' , '너무 보고 싶어서 못 참겠는 걸 어떡해.'와 같은 대사는 간지럽고 로맨틱하다.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 등의 대중 매체에서도 흔히 이런 걸 소재로 삼고, 낭만적으로 그려낸다. 이런 상황은 이제 몹시 식상하지만 여전히 다채롭게 변주된다.

매력적인 마초 캐릭터가 카리스마 있게, 종종 '벽치기 키스'의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다가간다. 상대는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지만, 이내 반해버리고 그와 사랑에 빠진다.


그런 상황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거나, 강압적이고 폭력적이므로 지양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연애의 감정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때로는 불가해한 영역이다. 강렬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과감한 스킨십이 관계 진전의 결정적 촉매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운 전개는 두 사람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결국 좋은 관계로 이어진 경우이다. 만약 한쪽이 이런 종류의 대시dash를 몸서리치게 싫어한다면? 어떤 지점에서 불쾌함을 경험했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 불쾌한 사건이 될 뿐이다. 요컨대, 이런 행동은 위험이 뒤따르는 일종의 모험이다.




"그런 걸 뭘 물어봐~ 그냥 해, 괜히 더 어색해진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니? 척하면 척이지"


이런 말은 위험하다. 흔히, 불필요해 보이는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 '눈치가 없어서 상황을 어색하게 만든다'라고 핀잔을 준다. 정말로 그렇다손 치더라도, 혹여나 일어날 수 있는 사고를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사람은 안전하다. 차를 타면 무조건 안전벨트를 하도록 되어있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우리 인간에게는 사회적 지능, 일명 눈치라는 것이 탑재되어 있어서 원활히 상호작용할 수 있지만, 그 사회적 지능의 편차는 너무 크고 일정한 기준이랄 것이 없기에 오해가 생길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모험보다는 안전을 추구했으면 좋겠다. 누구도 다치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 자체는 순수하지만, 그 아름다운 가치가 어떤 아름답지 못한 결과의 구실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모두를 보호하는 안전한 관계 맺음을 가르치고 싶다. 이것은 비단 성性에만 국한되지 않는, 모든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다. 일상생활에서 나의 화법이 학생들에게 큰 영향이므로, 평소 학생들 앞에서 말을 할 때는 한 박자 늦더라도 신중을 기한다. 가끔 실패하기도 하지만.


첫째, 외모에 대한 언급은 최대한 피한다. 외모 지적은 명백한 모욕이고, 외모 찬사 또한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칭찬으로 인식되지 않을 수 있기에 피하는 것이 좋겠다. 일례로 나의 경우, 살아오면서 유독 큰 키가 싫었다. 키 때문에 주목받는 상황이 몹시 불편한데도, 사람들은 나에게 '키가 엄청 크시네요!', '와, 키 커서 좋겠어요~'라고 수없이 말했다. 그때마다 어딘가로 숨고 싶고, 마음이 편치 않았음을 고백했다. 이 이야기에 학생들 대다수가 공감하지는 않지만 '그럴 수도 있구나' 정도의 반응이라도 반가웠다.


둘째, 상대방의 의사를 습관적으로 묻는다. 가령, 학생들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할 때는 "OO야, 선생님이 개인적인 질문 하나 해도 될까?" 하고 먼저 묻는다. 의외로 곧바로 "아니오."라고 답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럴 때면 묻고 싶었던 걸 바로 접는다. 혹은 대화할 때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럴 땐, "샘이 이런 거 묻는 게 혹시 불편하니? 모든 일에는 너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니까, 불편하거나 싫으면 편하게 말해도 돼."라고 꼭 말해준다.


셋째, 사람이 느끼는 감정 자체는 잘못될 수가 없음을 상기한다. 누가 어떤 일을 통해 어떤 감정을 겪었고 그 느낌을 표현한다면, 그대로 인정해준다. 그렇게 느끼는 것에 대해 이상하다거나, 잘못됐다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를 노골적 드러내지 않는다. 특히, 타인이 나로 인해 불쾌감을 느꼈다면, 먼저 그 일에 대해 사과를 하고 볼 일이다. '그게 대체 왜 불쾌해? 나 같으면 전혀 불편하지 않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반응하네? 특이하다..'와 같은 사고보다는 '타인은 내가 전혀 이해 못 하는 방식으로 느낄 수도 있다'라는 생각의 방향이 맞다.



말이 지나치게 많은 편 vs. 말이 지나치게 없는 편


굳이 둘 중에서 골라야 한다면 나는 단연 후자를 꼽는다. 인간관계에서 적재적소의 입담, 재치 있는 티키타카가 주는 즐거움이 크지만, 실언했을 때. 그 대미지의 크기는 결코 그것이 주는 즐거움을 상쇄하지 못한다. 갑갑한 안전벨트를 매고 긴 시간 이동하는 것과, 자유롭게 벨트를 안 매고 있다가 사고를 당하는 것 중에 무엇이 나은 지 생각해 볼 일이다. 관계 속에서 다치는 이가 없도록, 우리는 최소한 이 영역에서 더 예민해질 필요가 있다.





사례 3의 뒷 이야기.


그런 일에 대한 매뉴얼 같은 건 몰랐다.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교감선생님이 말하는 징계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그 또한 잘 알지 못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사람이 아이들로 하여금 징계라는 난처한 일을 겪게 하는 것인가 싶어 혼란스러웠다. 처음에는 화가 났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아이들이 벌을 받길 바라는지 아닌지조차 모르겠는 지경이 되었다. 당시 주변 사람들은 피해자였던 내 감정에 관심을 갖기보다 최대한 조용하고 신속하게 이 일을 수습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확실한 건, 그 상황이 죽도록 수치러웠다는 것과 그 아이들과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심정이었다.


그 사건에 연루된 학생들은 그들의 남자 담임선생님에게 매를 맞았다. 엎드려뻗친 자세로 몽둥이로 엉덩이를 십여 차례 맞았다고 들었다. 그렇게 끝났다. 남은 학기 동안 나는 그 반수업을 그대로 들어가야 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그 교실에 들어갈 생각에 너무 괴로웠다. 그 교실에서는 다른 에서처럼 자연스럽게 수업하기가 힘들었다. 어서 빨리 그 해가 끝나기만을 기다렸고, 이듬해 학교를 옮겼다. 마음이 많이 고단했던 시절의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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