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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Oct 29. 2022

수학여행에서 생긴 일(1)

3박 4일의 기록



우리 중에 날씨 요정이 있는 건지, 여행 내내 쾌청하고 맑았다. 제주답게 바람이 세차게 불긴 했지만, 비는 한 번도 오지 않았고 햇살이 찬란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바다, 햇빛, 초록의 숲, 그리고 구멍 송송 현무암을 밟으며 걸었던 길이 벌써 아련하다. 아이들과 함께했기에, 학교라는 거대한 소속감이 주던 묘한 안정감이 있었다. 사소하고 친밀한 말들이 끊임없었고, 서로를 염려하고 챙겨주던 다정함이 오고 갔다. 그 감각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쓰는 기록이다.




1일 차


이른 아침 비행기였다. 4시 30분에 우리 반 아이 한 명을 픽업해서 학교에 도착하니 5시였다. 몇몇 아이들은 못 일어날까 봐 밤을 꼴딱 새고 왔다고 했다. 나도 설레서 잠을 거의 못 잔 상태였다. 공항 가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아침이 밝아오는 걸 보았다. 공항 수속을 마치자마자 탑승장으로 직행했다. 시간이 촉박해서 정말 물 한잔 마실 여유가 없었다. 비행기에서 잠시 눈을 붙였는데, 도착 안내방송이 들렸다. 정신을 챙기고, 각자의 수하물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제주에 왔다, 마침내! 신이 났는데, 목이 말랐다. 편의점에서 생수 한 병 사서 원샷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개인 시간이 귀한 단체 패키지여행이. 45인승 관광버스의 짐칸에 캐리어를 착착, 꽉꽉 싣고 우리도 탑승했다. 친절한 기사님이 물 한 병을 건네주시길래 감사합니다! 하고 냅다 들이켰다. 그제야 제주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에게 제주는 올 때마다 매번 좋은 기억이 쌓이는 곳이다.  이름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몇 안 되는 장소. 이게 몇 년만의 제주인지.. 감격스러웠다.


버스를 타고 우리의 첫 목적지인 제주 4.3 평화 공원에 갔다. 공교롭게도 휴관일(첫째, 셋째 월요일 휴관)이었다. 엥? 우리 여행사 직원분의 설명에 의하면, 일정상 다른 날은 그곳에 방문할 여유가 도저히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었다. 기념관 내부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야외의 위령 광장과 제단, 위패봉안실을 관람할 수 있었다. 넓은 부지에 공간미를 잘 살려서 조성된 그곳은... 너무 추웠다. 아, 역시 제주의 바람은 육지의 그것과 차원이 다르구나, 하며 다들 옷깃을 여몄다. 아침도 못 먹은 상태였던 우리는 배 몹시 고팠다. 그 와중에 위패봉안실이 수많은 이름이 새겨진 걸 보고, 춥고 배고프다는 이야기는 잠시 넣어두기로 했다. 확인된 사망자가 1만여 명, 추정 희생자는 6만에서 8만에 이른다고 한다. 이렇게 숫자로 듣는 것과 그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읽는 것은 현저히 다른 경험이다.


제주 4.3 평화 공원


첫날의 가장 좋았던 순간은 점심식사 후 갔던 애월 카페에서였다. 2층 통유리 너머로 파도치는 바다를 보며 커피를 마셨고, 몸과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그렇게 동료 선생님들과 따뜻한 커피와 도넛을 먹으며 달달한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은 주위 바닷가에서 서로의 사진을 찍고, 기념품 가게에서 산 감귤 모자를 쓰고 다녔다. 리서 본 아이들은 평소보다 좀 더 귀여웠다.

애월의 어떤 카페


그다음으로 오설록 티 뮤지엄에 갔다. 우리의 18살 남학생들은 화장품, 티, 커피 같은 걸 파는 그 공간에서 대체로 겉돌았다. 자연스럽게 주문, 착석하고 여유를 즐기는 이들은 극소수였고, 삼삼오오 모여서 잔디밭에서 웃긴 포즈로 사진이나 릴스를 찍거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했다. 그 천진함이라니. 이니스프리에서는 뭘 사야 할지 몰라하며 티 나게 머뭇거리길래 다가가서 '누구 선물 사는 거야?' 물어보니, 대부분 엄마에게 줄 뭔가를 사고 싶다고 했다. 용돈을 받아서, 보답하고 싶다는 효자들이었다! 아무래도 핸드크림이 무난할 것 같아서, 아이들과 서로 손등에 향기를 테스트해보며 재미나게 골랐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기나긴 첫날, 마지막 일정은 무려 제트보트였다. 정말이지 개인여행이었다면 결코 포함시키지 않았을 코스라며, 피곤하니 이만 호텔로 가서 쉬고 싶다며 옆자리 선생님과 한마음으로 속닥거렸다. 그 말을 한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제트보트의 스릴을 맛본 우리는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버렸다. 바다를 시원하게 가르며 급속도로 급정거와 급회전을 시전 하는 운전기사님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쌓였던 피곤이 다 날아갔다. 보트를 타고 주상절리에 다가가니 그 신비로운 형상이 더욱 놀라웠고, 바다에서 보는 한라산 뷰는.. 말할 수 없 아름다웠다. 왜 제트보트가 수학여행에 단골 코스인지 알 것 같았다.


늦은 오후의 제트보트


보트를 타느라 머리가 젖은 채로 우리는 호텔에 체크인했다. 포근한 침구와 각종 어메니티가 잘 갖추어진, 쾌적하고 안전하고 아늑한 그곳에 감동했다. 우리 아이들은 미리 방을 배정한대각자의 2인 1실로 들어갔다. 호텔에서 마련해 준 특별 뷔페식도 훌륭했다. 각종 고기반찬에 전복, 사시미, 디저트까지 푸짐하고 맛있었다. 아이들이 "호텔 방 좋아요! 밥 너무 맛있어요!"라고 해서 내 마음도 놓였다.


저녁식사 후 나는 숙소 근처로 산책을 나갔다. 다음날 아침에 아이들과 조깅을 하기로 되어있어서, 러닝 코스를 미리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그 일을 기획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게도 나는 지독한 길치, 지도 어플을 켠 채로 몇몇 길눈이 밝은 아이들과 동행했다. 여행을 갈 때면 나는 그곳을 달려보고 싶은 로망이 있어서 러닝화를 꼭 챙긴다. 이번에도 개인적으로 러닝을 잠깐 하려고 했는데, 우리 학생들 중에 희망자들이 있어서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다. 마침 근처에 해양공원과 산책로가 있어서 직접 걸으며 길을 익혔다. 과연 내일 새벽 5시 반에 몇 명이나 나올까, 기대하며 인스타그램과 카톡으로 다시 한번 새벽 조깅 공지를 올렸다. 응..? 좋아요 9개? 불안한데..



산책에서 돌아와서 따뜻한 물에 씻고 나니 급 노곤 노곤해졌다. 나와 함께 3일 동안 트윈룸을 쓰기로 한 옆반 선생님과 각자의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 오늘 하루 중 제일 좋다.. 아늑하다.. 하면서. 우리는 오늘 하루 수고 많았다며 서로 칭찬하고 격려했다. 평소에 마음이 잘 맞는 우린 진심으로 서로 편했다. 그녀는 "나 말이야, 자다가 화장실을 자주 가는 편이라서,, 너를 깨울까 봐 걱정돼."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나도 "쌤 나두, 사실 낯선 환경에서 잘 못 자거든요.." 하고 걱정했다. 그 말이 무색하게, 우리둘 다 밤새 한 번도 안 깨고 꿀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서로를 보고, "뭐지?  앞으로 함께 여행을 다녀야겠다"한참 웃었다.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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