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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Nov 07. 2022

어떤 깨달음

오늘은 발행

작가의 서랍에 발행하지 못한 글이 쌓이는 중이다.

두서없이 써 내려가다가 마무리에 길을 잃은 끄적임 들이다.

오늘도 그런 글을 쓰고 있다. 끝을 어떻게 맺어야 할지 모르지만 일단 쓰기 시작했다. 끝이 예상되지 않는다는 건 메시지가 명료하지 않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고 싶은 것들은 있다. 사실 쓰고 싶다기보다는 말하고 싶은 것이고, 말하고 싶다기보다는 배출하고 싶은 것이다.

서글픈건, 말할 사람, 그러니까 들어줄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내 속에 있는 무엇이건 다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상대를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자라나서, 이제 그 누구에게도 속내를 다 펼쳐 보이지는 않는다. 그 대상이 가족이든, 친구이든.

그래서 나는 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쓸 때조차 나를 다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점점 거울 속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워지듯, 글에서 나를 드러내는 것이 어렵다. 고작 나 혼자 읽을 글 한자락 쓰는 일에 용기라는 걸 내야 한다는 사실이 우습다.




오늘은 힘든 하루였다.

전날부터 경미한 어지럼증이 있었는데, 그게 오늘까지 이어졌다. 눈앞의 사물이 빙글빙글 천천히 돌았고, 그로 인해 속이 매스꺼웠다. 이 증상은 이전에도 수차례 겪은 적이 있어서 아는 고통이다.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을 땐 출근을 못하기도 했다. 대체로 몇 시간 정도 누워있다 보면 나아지는데, 이번 어지러움은 경증인 대신에 오랜 시간 지속됐다. 아무튼 오늘은 출근을 했고, 교실에서 아이들을 마주하고 수업을 했다. 머릿속은 종일 안개가 낀 듯 흐렸다.


1교시는 담임 시간으로 오늘은 독서감상문 쓰기 행사가 있었다. 아이들은 종이를 받아 들고도 쓸 생각이 없어 보였다.

- 쌤, 이거 꼭 써야 해요?

- 읽은 책이 없어요..

- 샘 이거 생기부에 들어가요?


하더니 나중에는 그냥 손을 놓고 핸드폰으로 웹툰이나 유튜브 쇼츠를 넘겨보고 있는 것이었다. 뭐라도 쓰고있는 이들은 극소수였다. 그러게 평소에 책 한 권쯤 읽자고 그렇게 말했거늘. 당최 읽지를 않고, 읽은 것이 없으니 쓰지도 않고, 이렇게 늘 귀한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한심하고 답답하고 화가 났다.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나.. 하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뒤쪽의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흥분해서 욕을 했다.


- 야이 씨 미친놈아!

황당한 내 표정을 보고는 다급히 변명하길,

- 아 쌤, 얘가 여기 자기 침 묻은 걸 제 옷으로 닦잖아요!


하아.. 갑자기 머리가 더 심하게 아파왔다.



점심시간에는 반대항 축구 토너먼트 준결승 경기가 있었다. 축구에 진심인 우리 반 아이들은, 점심도 거르고 경기를 뛰었다. 밥 먹고 바로 뛰면 힘들어서 안된다나? 상대는 강팀이었고, 우리는 운 좋게 준결승까지 올라간 상황. 관중석에 앉은 대부분은 우리 반이 질 거라고 예상했다.


역시나, 패했다. 우리 팀의 핸들링으로 급기야 페널티킥까지 내줬다. 4:0이라는 스코어보다 속상한 건, 상대의 골이 이어지면서 속수무책으로 꺾이는 우리 팀의 사기였다. 허무하게 볼을 뺏기고,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걸 내주고...


가을의 한낮,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내 어지럼증은 심해졌다. 내 주위에서 대놓고 상대팀을 응원하는 다른 반 아이들이 미웠다. 우리 반의 실책을 조롱하고 욕하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경기가 끝나고 축 처진 어깨로 걸어 들어오는 우리 반 선수들을 나는 격려해주지 못했다. 어차피 이럴 거 밥이라도 먹고 지지.(상대편은 밥 먹고도 잘만 뛰더라.) 패배한 와중에 배까지 고플 아이들이 안쓰러우면서도 왜 그렇게 못하는지, 화도 났다.



미간에 주름이 생긴 채로 하루를 버텼다.

일과가 끝날 무렵, 근처에 사는 친구에게 반가운 톡이 왔다. 그녀는 나에게 맛있는 걸 전해주려고 학교 주차장에 짠 하고 선물처럼 나타났다. 나는 종례를 하고, 급히 노트북을 접고 가방을 싸서 나갔다. 우리는 학교 근처 카페에 가서 커피를 주문하고, 야외 좌석에 앉았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 길을 바라보며, 30분 남짓을 나란히 앉아있었다. 나는 오늘 하루 힘들었던 일들을 간추려 말했고, 그녀는 늘 그러듯 내 이야기를 공감하고 경청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오랜 스승님으로부터 들었다는 인상적인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것은 '의식의 확장'으로 요약될 수 있는 영적인 이야기였다. 개, 고양이 같은 동물의 원초적인 의식부터,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고 알아차리는 고차원의 의식. 핵심은, 그 의식들 사이에는 우열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인 동시에, 알아차림을 할 수 있는 명상가라는 사실. 그것은 나에게도 큰 깨달음이었다. 갑자기 머리에 낀 안개가 걷히는 듯 정신이 맑아졌다.



나의 두통과 어지럼증은 불쾌를 가져왔고, 불쾌한 마음 상태에서 나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더 높은 단계를 추구하고자 하는 강박이 그 틈을 파고들어 나를 원초적으로 자극했다. 나의 고2 남학생들은 늘 책을 읽지 않았고, 항상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그들의 일상 언어에는 대체로 욕이 녹아있고, 우리 반은 원래 축구를 못했. 평소 일상에서 나는 아이들의 행동 그 이면을 보는데, 오늘은 한순간도 그러지 못했다. 화라는 감정이 훅훅 끼쳐온 건, 오늘 나의 의식이 저 아래에 머물렀던 탓이리라. 하지만 그 모습 또한 나의 일부라는 걸 알아차리고 인정해본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나아진다.



우리 반 아이들이 일요일이었던 어제도 학교 운동장에 나와서 네 시간 넘게 축구 연습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그러고도 졌으니 마음이 어땠을지.. 지금은 화는 안 나고, 대신 짠하고 귀엽다.

 

   

그녀의 선물 - 후토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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