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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Feb 27. 2023

수학여행에서 생긴 일(2)

여행 기록과 어떤 부고

서랍 속에 개월간 묵혀둔 글을 이제야 꺼낸다.

여행기랄까 기행문이랄까. 이런 종류의 글쓰기에 취약하고, 다시 읽어볼 때마다 마뜩치않아서 그냥 넣어 두었다. 오늘은 여러 마음이 교차하는 상태로, 용기 내어 발행을 누른다.



우리 반 22명을 포함한 2학년 120여 명의 아이들과 공유했던 3박 4일의 기억이다.

10월의 제주. 운 좋게도 내내 화창했던 날들. 그 선선했던 공기의 질감. 바닷가에서 불던 따뜻한 바람.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걸었던 한라산.


우리는 식당에서 매 끼니를 함먹었고, 밤에는 숙소에서 배달음식을 시켜놓고 마피아 게임 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인솔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여행에 스며들었다. 교실 밖 우리 아이들은 표정이 더없이 생생했다. 마스크 벗은 그 아이들의 얼굴을 맘껏 봐서 좋았다.




그중에 Y도 있었다. 우리 반 소속이 아니었기에 수학여행에서 살뜰히 챙기지는 못했지만, 수업시간에 나와 종종 눈을 마주치던 아이였다. 수업 중엔 말이 없었지만, 개별활동으로 대할 때면 수줍게 웃던 그였다. 착실한 태도에 어딘지 어른스럽고 성숙한 분위기가 있었다. 또래 사이에서 혼자 튀거나 겉돌지 않았고, 친구들과 교사에게 늘 친절한 아이였다. 수학여행에서도 정해진 시간을 잘 지키고, 규칙을 준수하였기에,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평소 수업시간에 추가 활동으로 긴 영어 문장 암기를 시키곤 했다. 몇몇 아이들은 문장을 띄엄띄엄 외워가지고는 호기롭게 "준비됐습니다 쌤!" 외치며 엉터리 문장을 읊어대며 우리를 웃겼다. 반면 Y는 늘 신중했다. 영어에 자신감이 낮아 보였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어렵사리 외운 문장을 작은 목소리로 더듬더듬하다가 "아.. 다시 외워올게요 샘" 하고 멋쩍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Y가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네? 말도 안 돼. Y가?? 이름 확실해요?? 핸드폰에 귀를 갖다 대고 내가 잘못들은 건 아닌지 재차 확인했다.

그는 3주 전부터 신변 정리를 깔끔하게 했다고 한다. 어떤 식으로인지, 자세한 정황은 알지 못한다. 그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만 안다.



황망하게도 이 상황에 내가 할 일은 행정절차였다. 학교생활기록부 마감을 풀고, 학적 특기사항에 '사망'이라고 작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일을 완수하기 위해 학교생활기록부를 열어 Y를 마주했다. 생활기록부는 성실했던 그 아이의 학교생활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1학년 개근. 2학년 개근. 독서기록우수상 수상. 교과세특은 Y가 수업시간에 얼마나 착실한 아이였는지 말해주었고, 담임선생님은 행특에 아이의 긍정적인 성향과 타인을 배려하는 성숙한 태도에 대해 쓰셨다. 내가 관찰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고를 전해 들은 이후, 내내 마음이 갑갑했다. 

무언가가 가슴에 걸려서 내려가지 않는 듯 턱턱 막혔다. Y가 어떤 사정으로 인해인지 많이 외로웠을 것 같아서 슬다. 그 아이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줄 이가 없었던 건 아닌지 안타까웠다. 이렇게 끝나버릴 수가 있는 것인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왜? 대체 왜? Y가 너무 아까워서 사무쳤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 글을 읽을 이들 중에 Y를 직접 아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부고는 같은 반 아이들에게만 알렸다고 하니, 개학하고 나서야 그의 부재를 알아챌 친구들도 있을 것이다.



2022년의 Y를 잘 기억하고 싶어서 이 글을 남긴다.

그저 학교 영어 선생 중 한 명이자 옆반 담임쌤일 뿐이었지만, 나는 그가 얼마나 괜찮은 아이였는지 똑똑히 기억해두고 싶다. 그래서 혹여 누군가가 Y에 대해 묻는다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것들을 잘 말하고 싶다.



어떤 주제로 토론이 분분했을 때, 조심스레 의견을 밝히던 너의 진중한 표정을 기억한다. 나서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의사가 분명한 아이였지.

문장외우기를 너무 어려워할 때, 내가 거듭 힌트를 주어서 마침내 성공했을 때. 몹시 기뻐하던 너의 얼굴을 기억한다. 성취감 가득하던 그 표정.

우리가 교실에서 나누었던 그 사소한 말들을 기억한다. 모두 좋은 말들이었지.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마다 네가 미소와 목례로 인사했던 것을 기억한다.



너의 모든 과정과 노력은 훌륭했다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고, 수고 많았다고

어떻게든 말하고 싶다.








수학여행 2일 차


캄캄한 새벽 5시. <제주바다조깅클럽>이라고 이름 붙인 비공식일정을 위해 기상했다. 1층 로비에는 8명의 아이들이 먼저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명 한명 안아주고 싶을 만큼 반갑고 기특했다.


우리는 어제 봐두었던 코스로 함께 달렸다. 어두운 길을 운동부와 체대입시 준비생 둘이 성큼 앞장섰다. 머지않아 호흡과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몸이 데워졌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그 감각이 좋았다. 그날 제주 아침 공기는 기온과 습도 모두 완벽했다. 바다 쪽으로 다가가자 일출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주도에서 일출런이라니. 감격적이었다. 선두에 선 아이들은 가끔 멈춰서 뒤에 오는 친구들을 기다려주었다. 배려넘치는 아이들. 우리는 해양공원에 있는 다리에 올라가서 일출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겼다. 1시간가량 적당히 뛰고 걸으며 돌아오는 길, 밝은 표정의 아이들을 보며 나는 무척 기뻤다.





수학여행 3일 차


대망의 한라산 등반을 하는 날이었다.

오전 8시 30분, 한라산 입구에 도착하여 각자 휴대전화에 받아놓은 입장 QR코드를 제시하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 반 반장을 비롯한 몇과 나란히 걸었다. 성판악코스는 대체로 완만했지만, 나무데크가 없는 구간에서는 거친 돌길이어서 쉽지 않았다. 발목이 접질릴까 봐 조심조심 걸음을 내디뎠다. 아직 등산화를 갖추지 못한 대부분의 우리 아이들은 운동화를 신었는데, 하산했을 때 신발 바닥이 찢어져 있기도 했다. 체력이 월등히 좋은 우리 반장 J는 주위 친구들이 잘 오르고 있는지 계속 확인하며 내 옆에서 보조를 맞추었다. J는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를 업고서라도 산을 올라갈 기세였다. 그날 우리에게 가장 든든한 사람이었다.


진달래 대피소까지 약 2시간 걸렸다. 우리는 그곳에서 잠시 쉬며 준비해 간 도시락을 먹었다. 기온이 떨어져서 많이 식어있던 도시락을 맛있게 먹고, 빈 용기는 쓰레기봉투에 모아 넣었다. 그 쓰레기봉투를 자기 배낭에 넣고 가겠다는 우리 반 C군이 기특해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산행에서는 개개인의 체력차이가 극심다. 뛰다시피 해서 정상에 오른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대피소까지 오는데도 힘에 부쳐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놀라운 건, 크록스샌들을 신고 선발대로 정상까지 오른 아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아이와 함께 산을 오른 친구는 더 가관이었다. 허벅지 위로 올라오는 러닝쇼츠 차림이었다. 복장에 관해 수없이 주지 시켰는데도 이처럼 튀는 아이들은 있다. 이것은 반항인가, 패기인가.. 어쨌든 그들의 체력과 끈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나가던 등산객들은 연신 "아이고~ 젊음이 좋네 좋아" 하셨다.



진달래 대피소에서부터는 끝없이 가파른 계단이었다. 헉헉거리느라 다들 말수가 줄었다. 1시간가량 계단을 올랐더니 마침내 정상이었다.

한라산 백록담


산 정상은 기온이 0도쯤 되는 듯 추웠고, 강풍이 심했다. 예의 그 크록스와 반바지 차림의 아이들을 후딱 내려보냈다. 나는 아이들과 기념사진을 열심히 찍었는데, 나중에 봤더니 사진 속의 나는 머리가 사방팔방으로 사정없이 날리고 있었다. 어쨌든 날이 좋아서, 파란 하늘 아래 백록담뷰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정상에 도달했다는 성취감을 얻었고, 가장 높은 곳에서 제주 바다를 내려다보는 절경을 눈에 담았으니 우리는 충분히 럭키했다.


어째서 하산길은 늘 등산길보다 훨씬 더 멀고 길게 느껴지는 것인지.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내려오는 약 3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우리는 쉬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잘하고 싶어서 노력하는데도 잘 안 되는 것들, 가족 혹은 가까운 어른들에 관한 고민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크고 작은 사안들. 끝없이 앞을 보며, 발을 내딛으며, 우리는 서로의 말을 차곡차곡 들었다. 나는 그들이 겪는 어려움에 공감하고 노력에 감동했다. 그 모든 고민의 과정을 응원했다. 반장 J는 조용히 내 옆을 걸으며 다른 아이들이 각자의 이야기와 고민을 말할 때 경청했다. J는 나름의 힘든 시간을 겪는 중이었지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1대 1로 있을 때만 속내를 털어놓는 편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그저 가끔 눈을 마주치기만 했다.


수학여행을 다녀온 후 J가 써낸 소감문은 그의 마음을 담고 있었다. 제주에서 돌아오고 싶지 않을 만큼 그 시간이 좋았다고 한다. 한라산에서 나눈 이야기들은 그 이후로도 우리들을 단단하게 묶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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