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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Nov 16. 2022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우리는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는가

십 수년 전(세상에, 20년이 다되어간다) 만났던 내 첫사랑은 나를, 나와 만났던 그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과연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일까.


우리는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는가.


시간이 흐르면서 맥락은 사라지고 인상만 남은 장면들, 반토막난 기억들. 그것들을 진실이라고,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소설의 초반부, 주인공 토니가 고등학생일 때 교실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화두가 던져진다. 누구보다 명철한 지성과 우아한 겸양을 가졌던 친구 에이드리언. 그는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답한다. 실로 이 소설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층위의 문장이다.



예순의 노인이 된 토니 웹스터. 그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평범한 노년의 어느 날, 그는 40여 년 전 자신의 친구 에이드리언과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베로니카에 관한 기억을 떠올려야만 하는 일을 겪는다. 토니는 생존본능 혹은 자기 보존 본능 때문에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자신을 괴롭히는 기억을 곧잘 잊어버린다는 말을 변명처럼 반복한다. 나는 이 대목에 깊이 공감했으므로 책을 읽는 내내 자기 반영적일 수밖에 없었다. 내 삶에서 작동한 기억이라는 방편에 대해 생각했고, 혼란스러웠다.




이 소설을 10년 전 독서모임에서 읽었었다. (주로 문학을 읽던 모임이었고, 이 책은 2011년 맨부커 수상작이라서 무리 없이 선정되었다.) 첫 회독 때의 주요 인상은, 화자가 지나치게 밑밥을 깔고 있다는 짙은 의혹과 그 결말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뭔가 있어.. 분명 뭔가 있구만.. 대체 뭐길래 이렇게 말이 많아..' 하는 심정으로 문장을 빠르게 훑었다. 과연 입을 틀어막을만한 반전이 존재했다. 당시 모임의 선생님들과 나누었던 대화는 대체로 '작가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설정을 생각해냈을까'에 관한 것이었다. 여하튼 이 책은 꽤 충격으로 남은 터라 지금까지 내 서가에 꽂혀있었다.


내가 현재 나가는 독서모임에 이 책을 다시 추천해서 재독 했다. 계기는 얼마 전 직접 가서 들었던 김영하 작가님의 강의였다. 소설가가 작품을 구상할 때 쓰는 방법, 창의력이라는 주제에 대한 작가의 말을 듣다 보니 이 책이 생각났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과 짐짓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반스를 다시 읽고 싶어졌다. 10년 만에 다시 펼친 소설은 구석구석 새로웠다.


작품을 다시 읽을 때 우리는 이전에 못 보고 지나쳤던 것들을 새롭게 만나게 된다. 이 책은 특히 그러하다. 말 많은 주인공이 주저리주저리 쓸데없(어 보이는) 말을 늘어놓으며 독자를 갖고 놀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투척하고는 갑작스럽게 끝나버리는 이야기. (나처럼 눈치가 좀 부족한) 독자는 높은 확률로 '이게 무슨..!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거지? 내가 놓친 부분이 있나?' 하는 심정으로 앞장을 뒤적거릴 것이다. 글 속에 숨겨진 메타포, 노골적인 암시와 복선을 속속 발견하는 일은 분명 흥미로운 독서 경험이다.




※ 아래에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토니는 에이드리언에게 편지를 보낸 것을 기억한다. 그 내용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40여 년이 흐른 후 자신이 썼던 편지를 다시 마주하게 되는데, 그건 스스로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심지어 그가 쓴 내용 오이디푸스의 예언처럼 실현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제목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가 아니라 '예언은 틀리지 않는다'가 더 맞을 것 같다.)


때로 '과거의 나'가 타인만큼 낯설 때가 있다. 테세우스의 배 역설이 떠오른다.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세포도 6개월의 주기로 모두 바뀐다고 한다. 신경 세포는 죽지 않는다지만 신경 세포를 이루는 분자와 원자들은 매 순간 교체되고 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둘 사이의 머나먼 간극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을까.


토니는 젊은 시절의 치기, 질투, 분노, 수치심, 치졸함, 열등감이라는 감정에 휩싸여 상대방을 향해 저열한 언어를 쏟아냈고, 정작 본인은 그걸 잊어버리고 살았다. (비호감이긴 하지만) 토니라는 인물은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만큼 평범한 캐릭터이다. 철없는 허세 덩어리였던 어린 시절이 있었고, 자기기만이 습관이지만 최대한 숨기고 쿨한 척 살아간다. 그 찌질함을 목소리 높여 비난하고 있는데, 나의 무수한 결핍과 욕망이 튀어나와서 '저기요 그러는 댁은요' 하면서 나를 불러 세운다. 민망하다. 나는 일찍이 누군가가 잘못되기를 바란 적이 없었던가. 마음속으로 누군가에게 저주를 퍼부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가. 하아, 인간이 얼마나 섣부르고 감정적이며 불완전한 존재인지.


우리는 쉽게 동요했다가 금세 차분해지고, 불같이 격노하다가 이내 회한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대부분 오류 덩어리이다. 그것은 인간의 속성이자 한계인 것을. 능수능란한 작가의 필력에 짜증나리만치 감탄하며 책을 읽었다.


고조된 감정은 한차례의 높은 파도처럼 필연적으로 평정을 되찾게 마련이다. 나의 불안을 알아채고 나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나에게 그것을 수용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 또한 믿어 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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