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요함'을 유독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이다. 20대의 나는 음악을 크게 듣는 걸 좋아해서 클럽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음악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하고 다닌 그 시절이 조금 부끄럽지만, 요즘의 나는 음악보다는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 상태를 선호한다. 소음이 차단된 조용한 시공간은 깊은 편안함으로 나를 이끈다.우주로 가야 하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는 단연 도서관이다. 책을 읽으러 카페에 갈 수도 있지만, 누군가가소음을 발생시킬지도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두렵다. 그리하여 책을 꼭 읽고 싶을 땐 침묵이 보장된 도서관 열람실로 향한다. (백색소음속에서도 책이 읽히긴 하지만, 침묵 속에서는 그와 비교도 안될 만큼 머리에 쏙쏙 잘 들어온다!)
내가 자주 가는 시립도서관 3층 종합열람실에는 시험준비를 하는 듯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책에 집중하여 매진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생판 남인데도 왜인지 마음이 일렁거릴 만큼 좋다. 산악인들이 서로 '산에 오는 사람들은 다 좋은 사람들' 이라고 말하는 걸 자주 들었는데, 나는 도서관도 그러하다고 굳게 믿는다. 그곳에서는 개인 물병에 담아 온 물만 음용 가능, 외부 식음료의 반입은 금지이다. 덕분에 커피를 홀짝거리거나, 빨대로 아이스아메리카노의 얼음을 휘젓는 소리조차 듣지 않을 수 있다. 도서관을 이용하는 교양인들답게 열람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당연히 없다. '지속적인 타이핑을 요하는 작업은 1층 디지털열람실을 이용하세요'라는 안내문구가 곳곳에 붙어있으므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도 없다. 책장 넘기는 소리가 그곳의 유일한 소음이다.
같은 이유로 학교에서의 시험감독 시간을 좋아한다. 한 자세로 오래 서 있으면 다리와 허리가 아파오긴 하지만, 침묵이 강제되는 유일한 그 상황을 나는 꽤나 즐긴다. 자습시간이었다면 소곤소곤 떠들었을 애들도 시험시간만큼은 입 꾹이다.
그 황금같은 침묵의 시간. 마음 같아서는 활자를 읽고 싶지만 책을 읽을 수는 없는 시간이기에 주로 몽상에 빠진다. 아이들의 정수리를 쳐다보며 '저 아이는 나중에 누구와 어떤 사랑을 할까' 생각해 본다거나, 교실의 급식메뉴표를 보며 '오늘은 식판에 밥과 반찬을 어떤 구성으로 담아야 할까' 고민해본다.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끝없는 상념.업무 중이지만 은밀하게 즐거운 시간이다.
수영, 필라테스, 헬스 등 즐겨하는 몇몇 운동 가운데 요가를 으뜸으로 꼽는다. 요가선생님의 차분한 음성과 명상도 좋지만, 가장 좋은 건 사바아사나(시체자세)이다. 근육을 마구 늘이고 비틀고 버티는 수련이 끝난 후 매트 위에 누워서 경험하는 침묵의 사바아사나. 그것은 형언하기 힘든 극강의 이완상태를 가져다준다. 내가 진정 사랑하는 그 시간. 사바아사나를 하기 위해 요가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스로에 대해 잘 알게 되니 싫어하는 것도 분명해진다.
특히 누군가의 말과 행동에서 불쾌를 느끼는 맥락과 경계가 명확하다. 처음 만난 누군가를 '파악'하는 데에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좋기도 하고 좋지 않기도 하다. 좀 더 겪어보면 그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믿음은 다수의 케이스를 겪으며 약화되곤 하는데, 이건 좀 슬프다.
I 성향이 강하지만 E성향도 가진 탓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모이는 일이 잦다. 사람들을 꾸준히 겪다 보면 다채로운 감정이 느껴진다. 존경하는 사람에게서 절대 닮고 싶지 않은 면모를 발견하기도 하고, 경멸하던 이에게서 의외의 훌륭한 부분을 보기도 한다. 모든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쉽게 타인을판단하고 분류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는 내가 이해 못 하는 타인을 다짜고짜 경멸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라는 순순한 아량을 품고 싶다. 결국에 내 판단이 맞았다 하더라도 그때 느껴질 허무함을 잘 견디고 싶다.
최근에는 누군가를 바라볼 때 측은지심을 가져보자는 다짐을 해보았다. 이건 알고 지낸 지 꽤 오래된 내지인에게서새롭게 발견한 아주 멋진 삶의 자세였다.
나이를 먹으며 스스로와 더 친해지는 중이니,좀 더 유연해질 수 있다고도 믿어볼 따름이다. 10년 전 요가를 할 때보다 지금 내 몸이 훨씬 유연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