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지음 Jan 17. 2021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대의 안녕이 나의 안녕이 되기를

 요즘 들어 자꾸만 분노하는 스스로를 만나게 됩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아무 일도 아닐 것들에 화가 나고 마음이 답답해지고, 그로 인해 마음이 상하는 자신을. 주변 사람의 얘기라면 참 힘들겠다고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주인공이 저라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건 왜일까요.


 저는 원래부터 매사에 조금 더 민감한 편이긴 했습니다만, 요즘은 그로 인한 분노가 많아지는 것 같아 조금 걱정입니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 같았으면 속으로만 화가 나고 말았을 일들에 대해 이제는 조금씩 분노를 표현하고 있어서 그런 스스로가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지난 1년, 제가 맡았던 주된 업무 중 하나는 민원이었습니다. 동사무소보다는 훨씬 업무량이 적지만, 그래도 민원인분들께 제증명을 발급해 드리고, 민원 전화를 받고 응대하는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어요. 그리고 누구나가 생각하듯, 민원업무는 쉽지 않았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다짜고짜 전화로 쌍욕을 들어야 하고, 최대한 상냥하게 말하지 않으면 친절하지 않다고 또 욕을 먹는 그런 업무였으니까요.


 그러나 기본적으로 웬만한 가게를 가도 종업원보다 더 친절히 말하고 행동하는 편이라, 사실 친절하게 민원인들을 응대하는 것은 생각만큼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어려운 일은, '정당하지 않은 사유로 민원인이 화를 낼지라도 언제나' 친절해야 하고, '전화기 너머에서 쌍욕이 들려오든 술주정이 들려오든' 민원인이 전화를 끊기 전까진 전화를 끊을 수도 없이 모든 것을 듣고 참아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한동안은 전화 공포증이 생겨 전화벨이 울리면 손을 떨며 전화를 최대한 천천히 받기도 했고, 또 지난해 내내 퇴근한 뒤에도 종종 귓가에 사무실 전화벨 소리가 환청으로 들리기도 했습니다. 다른 과, 팀에서 일했지만 같은 시기 함께 발령받아 비슷하게 민원업무를 담당했던 동기는 '이 업무를 하면서 인류애가 사라졌다.'는 웃지 못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민원인분들의 사정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들어도 참 많이 답답하고 힘들어 전화하신 걸 알 수 있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슬프게도, 그렇다고 해서 정당한 대상에게 터뜨리지 못한 분노를 흠뻑 맞은 제 마음이 괜찮아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저는, 그때 누군가가 터뜨렸던 분노의 빗방울이 마음속에 한가득 고여 있다가 이제야 울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함께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서로 다른 '우리'가 모여 각자의 삶을 살아나가야 하는 세상은,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어렵고 힘든 곳인지요. 나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이 때로는 맞기도 하고, 때로는 부딪히기도 하면서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조금씩 채워 나갑니다. 그 삶의 큰 부분을 양보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기에 반대로, 작은 부분들에서 조금씩 서로를 배려하는 것은 그보다는 훨씬 쉬운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일상에서 만나는 사소한 일들은, 그조차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산책길 횡단보도에서 보행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오는 우회전 차량들, 조금은 혼잡한 길에서 지나가겠다는 말 대신 파리를 쫓듯 장갑으로 마주오는 사람을 치고 지나가는 누군가, 아직도 마스크 쓰는 에티켓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내가 조심하고, 양보하면 되지' 하고 생각하다가 요즘 들어 자꾸 왜 항상 양보는 나의 몫일까 싶어 분노하게 되는 자신을 만납니다.


 아, 어쩌면 지난날의 민원인분들도 이렇게 참아온 화를 제게 쏟아내셨던 걸까요. 문득, 나의 분노 또한 오늘 누군가의  '인류애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 각박하다는 말이 익숙해져 가는 우리의 일상. 내가 터뜨린 분노가 어디론가 흐르고 흘러 나처럼 우는 사람이 생기는 대신, 내가 건넨 배려와 양보가 어디론가 퍼져나가 지친 하루 속에서도 미소 짓는 누군가가 생기기를 바라며, 저는 소망해 봅니다.


사소한 양보와 배려가, 사소한 분노를 이기는 우리의 일상을.




누구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고, 대양의 일부이니. 한 덩이 흙이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 땅이 그만큼 작아지며, 곶이 줄어들거나 그대의 벗과 그대의 땅이 줄어들어도 매한가지이다. 누군가의 죽음이 나의 생명을 감소시키는 것은, 내가 인류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지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니.


- 존 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어니스트 헤밍웨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안은주 역, 시공사, 2012, 서문)


매거진의 이전글 어디로 가야 하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