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섬이니만큼 바다에 대한 로망이 큰 사람들이 오지만, 나에게 그건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그저 떠나고 싶었고, 어쩌면 떠나야 했고, 또 의존적인 내가 가족과 물리적으로 쉽게 이어질 수 없는 공간으로 제주도가 적당했을 뿐.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핸드폰 속에는 동서남북 해수욕장이 하나씩 다 ‘관심 장소’로 저장되어 있었던 걸 보면, 그래도 바다는 제주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기본값(?)인가 보다.
제주도는 섬이라서, 어디로 이동을 하든 여차하면 바다를 만나게 됐지만, 부러 목적지를 삼아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서쪽에 위치한 곽지 해수욕장이었다. 10년도 더 된 수학여행 이후 제주도에 한두 번 더 와본 기억은 있지만, 이렇게 자세히 바다를 들여다보고 감상한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인생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한 제주도의 바다는,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는 빛깔을 띠고 있었다. 흔히들 하는 표현으로는 ‘에메랄드빛’ 같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이상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을 뿐인 듯한 마음. 이런 빛깔의 바다를, 동남아 같은 해외가 아니라 국내에서 볼 수 있다니. 황홀함에 젖어 나도 모르게 넋을 잃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도 참 많은 바다를 다녀왔다. 밀물과 썰물 때문에 아침과 오후의 해안선이 눈에 띄게 달라지는 함덕, 서쪽의 핫플레이스라 사람도 많고 가게도 많은 애월과 협재, 까아만 모래와 암석이 인상적인 산방산 근처의 사계까지. 어느 한 바다도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내게 제주도의 바다는 왜인지 곽지만이 남게 되었다.
이유를 알게 된 건 얼마 뒤였다. 나의 한 달짜리 제주도 여행을 알게 된 아는 동생의 카톡 덕분이었다. 언니가 본 바다 중에 어느 바다가 가장 예쁘냐는 동생의 질문. 나는 괜스레 유명한 바다 이름을 말해야 할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지만, 솔직해지기로 했다. “곽지. 나는 곽지가 제일 예쁘더라.”
동생은 그곳을 잘 모르는 눈치라 신기해하며 자신의 1순위는 함덕이라 말했다. 얼마 전 제주도에 여행 와서 가장 처음으로 봤던 바다가 함덕이었는데 그 에메랄드 빛깔(!)을 잊을 수가 없다고. 나는 나도 모르게 속으로 빙긋 웃었다. 거위는 알에서 부화해 처음 만난 존재를 어미로 인식한다던데, 바다에도 그런 각인효과가 있는 게 분명하다 싶어서.
그래서였을까. 이번 여행에서 가장 처음 만난 바다였던 곽지가 나의 바다가 된 건. 온전히 혼자여야만 해서 섬으로 떠나온 나는, 그날 처음 제대로 마주한 그 바다 앞에서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 눈부신 빛으로 찰랑이는 그는 친구도, 사람도 아니었지만, 파아란 하늘을 따라 반짝이는 해변가에 선 나를 자꾸만 차오르는 파도로 안아주는 것만 같았다.
정말로 어른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태어난 연수에 따라 어른인 척 살다 보니 나 자신은 그저 섬이구나 싶을 때가 많다. 실제로는 섬인데, 육지인 줄 알고 여기저기 이어져 살다가 어느 순간 뚝, 하고 모든 것으로부터 끊어져 고립될 때마다. 그럼 그제야, 당황스러운 마음에 이리저리 분주히 뛰어다녀 보지만 섬 밖으로 나갈 수는 없고, 혼자 남게 된 나 자신은 너무나 낯설게 느껴진다. 아, 모든 게 다 끊어지기 전에 비상식량이라도 비축해 놓을 걸. 그때엔 너무 늦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무력하게 혼자임을 느끼기 전에, 생의 많은 순간 혼자여도 괜찮도록 자주 스스로를 돌아보고 돌봐줘야 한다는 것. 나 자신의 얘기를 잘 들어주고, 나의 섬에 필요한 것들을 미리미리 채워놓는 것. 세상으로부터의 다리가 끊어졌을 때, 정말 혼자가 됐을 때 한동안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마음의 조난을 대비하는 방법은 그런 게 다이지 않을까. 사실은 언제나 혼자라는 걸, 모두가 다 그런 섬이라는 걸 인정할 수 있을 때 나는 온전한 나 자신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내 앞에 나타난, 내가 섬이라는 걸 인정해주고 그런 나조차도 안아줄 수 있는 존재.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고, 나에게 가장 잘 맞는 방법으로 나를 꼭 안아줄 나의 바다.
그는 온전히 혼자가 되어야만 할 때 맞닿을 마지막 위로이고, 내게 꼭 맞는 피난처일 테니 많은 사람이 찾아올 필요도, 유명한 곳일 필요도 없다는 것을.
사는 동안에, 그런 나만의 바다를 만날 수만 있다면 그 생은 충분히 근사한 여행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곽지, 너를 만난 나의 생은 이미 충분히 근사해졌다 믿으며 나는 다시 내 안에 편히 머물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