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무망감과 우울에 빠져 처음으로 찾았던 정신과 병원에서, 조금은 무뚝뚝한 여의사 선생님이 내게 산책을 권했던 게 떠오른다. 누가 때린 사람도 없는데, 밖에서 맞고 들어와 엄마에게 하소연하는 아이처럼 말 한마디 한 마디마다 눈물이 차오르던 때였다.
업무 상황에서의 어려움, 인간관계에서 참아버린 스트레스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내게 의사 선생님은 ‘할 수만 있다면 햇살 좋은 오전에 출근이 아니라 산책과 운동을 권하고 싶다’고 얘기하셨다. 햇볕을 쬐며 가볍게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우울한 마음에 큰 힘이 될 수 있다며 말이다.
제주도에 뚜벅이로 여행 와서 가장 설레는 점은 돌이켜 보니 그거였다. 햇살 좋은 날 얼마든지 내가 원하는 대로 걸을 수 있다는 점. 그게 한적한 시내 거리든, 멋들어진 해변가이든 나는 아무것도 개의치 않고 마음대로 걷다가 힘이 들면 또 어딘가를 찾아들어 쉬고 새롭게 길을 나서면 되었다.
내 발걸음이 닿은 곳 중 맑은 날 찾아간 숲은 ‘비자림’이 유일했는데, 파아란 하늘과 초록빛 나무와 햇살은 다른 어떤 미사여구도 필요로 하지 않고 스스로 아름다웠다. 거기에 적당한 구름까지 그림처럼 수놓아지니 누구라도 핸드폰을 높이 들지 않곤 못 배길 풍경이었다.
비자림으로 들어가는 인원은 적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페이스를 조절해 가며 걷다 보니 중간중간 숲 속을 나 혼자 걸을 수 있는 시간들이 생겼다. 앞뒤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 후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숨을 들이마시는 찰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여린 나뭇잎이 햇살에 반짝거리며 흔들렸다. 코 끝에 와닿는 풀내음에 왜인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 이래서 다들 ‘산림욕’이란 걸 하는구나. 사람이 내어놓는 어떤 위로의 말보다 더 진한 위로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내가 보지 못한 사이, 어떤 망설임도 없이 제각기 다르게 자라난 나무와 풀들이 꼭 내 존재를 긍정해 주는 것만 같아서였을까. 비가 내리는 날씨였어도 차마 나쁘다 할 수 없을 광경이었으나, 햇살이 내리쫴 준 덕에 숲이 건네는 위로는 배가 되었다.
뭐가 그리도 지난했을까. 지난해의 나는 가만히 숨을 쉬어내는 것만으로도 벅차 숨이 가빴었는데. 오늘의 나는 그 숨결에 실려 온 바람과 풀내음 한 줌에 이토록 평안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니. 어쩌면 그저, 모든 것에 너무 잘 연결된 세상 속에서 나는, 고요히 혼자일 수 없어 병이 났던 건 아닐까.
생각을 멈추고, 일을 잠시 놓고, 누구와도 이어지지 않은 채로 온전히 숨을 들이쉬는. 그런 ‘나 자신’이 될 시간이 없어서, 그게 주어지지 않아서, 그걸 쟁취하지 못해서. 그래서 그렇게 부산스러운 마음이 마지막까지 탈탈거리며 뿌연 먼지를 뿜어내다 마침내, 주저앉아 버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다 혼자 온 내게 사진을 찍어줄까 물어보시던 노부부, 자식 손주들과 함께 길을 걷던 할아버지, 그 외에도 참 다양한 사람들을 숲속 길에서 만났다. 평소 같았다면 누군가와 함께인 사실이 마음 편히 여겨져 부러웠을 텐데, 그날은 누구도 나만큼 좋아 보이지 않았다.
햇살과, 나와, 숲과, 적당히 혼자가 될 수 있는 거리만 있다면 거기가 바로 내 마음의 욕탕이었던, 그 충만함을 전세 낸 기분은 아무나 느껴볼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비자림을 뒤로하고 나서는 내게, ‘너는 이제 괜찮아질 거’라고, 햇살을 한 줌씩 끼얹으며 깨끗이 목욕을 마친 마음이 조용히, 아주 조용히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