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4일 뉴질랜드는 코로나 대응 단계를 4단계로 올리며 전국 봉쇄령(Lockdown)이라는 극단적이지만 가장 궁극적인 규제를 실시했다. 슈퍼마켓이나 의료시설을 제외하고는 집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라에서 임금을 지원하여 봉쇄령 기간 동안 일을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의 임금을 매주 받았다.
봉쇄령이 처음 시작되었을 땐 주말처럼 늘어지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이렇게 돈 받으면서 온전히 하루를 내 마음대로 지낼 수 있는 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시간을 의미 있게 써보자는 마음으로 그동안 미뤄뒀던 일들을 시작했다.
영어공부, 포토샵 배우기, 블로그 시작하기 등 하루하루 내가 원하는 대로, 100% 나의 의지로 이루어진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게 지속된 5주가 지나고 출근을 하니 그 전에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질문들이 내 안에서 꿈틀꿈틀 생겨났다.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2020년 6월 현재까지 약 9년 동안 단 한 번도 일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다행히 아빠의 회사에서 학비를 지원해줬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처럼 학자금 대출이라는 거대한 빚을 지고 대학을 졸업하지는 않았지만, 21살 때부터 주거비와 생활비 등 내가 숨 쉬고 공부하는 데 쓰는 돈은 내가 벌어서 해결해왔다.
방학은 풀타임 알바를 찾아서 다음 학기 동안 쓸 돈을 만드는 시간이고, 학기 중에도 적어도 2개의 아르바이트를 병행했었다. 1년을 휴학해서 6개월 약국에서 번 돈으로 5개월 동안 필리핀 어학연수를 갔다 오기도 했고, 졸업 막 학기를 남겨놓고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다가 혼자서 6주간의 유럽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아르바이트 3개를 병행하며 취업준비를 하다 뉴질랜드로 왔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당시에는 유럽여행 비용 마련과 더불어 부모님과 함께할 호주 여행까지 해서 쉬는 날 하루 없이 6개월을 주야장천 일만 했다. 물론 그 와중에 술도 마시고 놀러도 다니고 했지만, 어쨌든 기본 상태는 일 그리고 남는 시간에 놀기였다는 말이다.
뉴질랜드로 왔을 때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초기 자금 100만 원만 들고 왔기에 당장 하루 벌지 않으면 물가도 비싸고 숙박비도 비싼 뉴질랜드에서 살아남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호주와는 달리 뉴질랜드는 계약서대로 최저시급을 따박따박 받아가며 유급휴가 비용까지 해서 법적 임금을 받았다는 것. 첫 4개월은 이런저런 일을 방황하다가 겨우 자리 잡은 작은 관광마을에서 운 좋게 일자리를 두 개나 구했다.
낮에는 베이커리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피자가게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동양인 자체가 워낙 작은 마을이고 주로 유럽이나 영국에서 온 백팩커들이 많았던 동네라 이때 영어 실력이 급상승하게 되었다. 어쨌든, 뉴질랜드 생활 1년 차 때는 하루 최대 16시간 일하며 힘들게 살았다. 7개월을 투잡을 병행하며 지내다가 남자 친구를 만나고 한 레스토랑에서 일했는데, 그때도 기본 주 45~50시간을 일을 했었다.
올초 새로운 곳으로 이사 오면서 한 달 동안의 백수 상태가 있었지만 이 기간에도 온라인으로 혹은 직접 카페나 레스토랑에 방문하며 지속적으로 면접을 보고 있었다.
의사, 변호사 등 인정받는 전문직은 아니지만 카페, 레스토랑, 바 등의 서비스직(Hospitality)으로 9년을 넘게 쉬지 않고 일했으니 이 정도면 열심히 살지 않았나.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이 끊긴 이후로 나는 '일을 구하는 중', '일하는 중', '일해서 번 돈으로 하는 여행' 이 세 가지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일하는 동안 쉬는 날은 말 그대로 쉬는 날일 뿐이다. 미뤄뒀던 집안일, 친구들, 가족들과 만남 등을 하고 나면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동안 보통 주 6일 일해왔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코로나 대응 단계가 내려가면서 다시 주 5일 출근을 시작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피곤해서 하고자 했던 일을 단 한 가지도 하지 못했고 그렇게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망가져갔다.
9년 동안 쉴틈 없이 일했는데 뭐하나 이룬 게 없는 것 같은 허전함, 앞으로 이렇게 살아도 될까 하는 걱정, 이렇게 내 정신건강과 신체적 건강 그리고 시간을 투자하며 버는 $22의 시급이 의미 있는 것일까 하는 끊임없는 고민..
막상 일을 그만두고 나면 뭘 해야 할지에 대한 준비도 확신도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 결국 서비스직 일자리를 찾아 다시 돌아갈지 언정, 쉬고 싶다. 출근해야 한다는 압박감 없이, 일을 구해야 한다는 부담 없이, 여행도 가고 싶지 않고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싶다. 이 시간 동안 가만히 집에서 책만 읽는다고 하더라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 같다는 확신하에 사표를 냈다.
하루가 다르게 구직란에 10건이 넘는 글이 올라오는 반면 구인란은 1-2개가 될라 말랑할 만큼 일자리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걸 너무나 잘 알지만,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난 6개월의 자산현황표를 통해 여행을 가거나 큰 지출을 하지 않는 이상 집세를 포함해 내가 숨만 쉬고 살 때 드는 비용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나에게는 나하나만 책임진다고 가정했을 때, 내가 6개월 동안 수입을 내지 않고 살아갈 돈이 있다.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약 6개월은 지금 생활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이 30살에 모은 돈이 이것밖에 없다는 것도 슬펐지만, 그래도 나 스스로에게 부담 없이 숨 쉴 6개월은 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도 했다.
비상금 전부를 쓸 수는 없기에 그중 반은 따로 빼두고 3개월은 구직에 대한 부담 없이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는, 자발적인 백수생활을 시작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