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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작가 Jan 23. 2021

결국 보고서

다른 직종 일은 어떤지 모르겠다. 사무직인 나에게 직장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냐'라고 물어보면 난 주저 없이 '보고서'라고 말하고 싶다.


많은 기업들이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보고서를 줄이고 회의를 없애야 한다고 한다. '보고서는 몇 장 이내로' 제한하기도 하는데 보고서를 좀 써본 사람들은 '1~2장'의 보고서가 얼마나 어려운 지 잘 알 것이다.  


거추장스러운 보고서는 없어져야 마땅하지만 그래도 결국 일은 '보고서'로 시작하고 '보고서'로 마무리된다. 새로운 정책을 입안하기 위해서도, 사업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서도, 소송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보고서가 있어야 한다. 말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직장 내에서 동료들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바로 '말로만' 일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보고서를 잘 쓴다는 것은 쉽지 않다. 쉬운 문장은 기본이고, 논리적인 전개, 사실에 기반한 근거,  눈만 갖다 댔는데 저절로 익혀지는 직관성, 읽고 나면 질문이 떠오르지 않는 충실성 등 좋은 보고서가 갖추어야 할 요소는 너무도 많다.


예전에 청와대 출신의 강사님의 보고서 교육에서 '시간이 없는 장관님에게 뛰어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잠깐 동안에도 내용을 전달하고 설득할 수 있도록 보고서'를 써야 한다는 말을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고 직장생활의 연차가 쌓이면서 급하고 중요한 상황은 자주 찾아왔고, 그 상황에서 제때 보고서를 만들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에 맡을 수 있는 일이 크게 달라진다는 것을 알았다.


보고서를 잘 쓴다는 것은 단지 문법에 맞게 작문하고, 편집을 잘하는 것에 '기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보고서를 잘 쓰는 사람은 문제를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고, 논리가 중언부언하지 않으며, 해결책이 명쾌하고 그것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종합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직장인의 삶을 잘 표현한 '미생' 만화를 보면서 작가의 디테일에 놀란 적이 있다. 드라마에서는 아주 짧게 묘사되었는데, 김대리가 장그래에게 '문장 줄이기'를 연습시키는 장면이었다. 단어를 바꾸고 어순을 바꾸고 여러 번 고친 끝에 긴 문장을 단순한 한 문장으로 줄이는 장면이었다.  


회사에서 '보고서 마스터'로 불리던 내 사수도 처음 나에게 한 조언이 '문장이 두줄을 넘으면 안 된다'였다. 그 이상이 되면 읽기 싫어진다는 것이다. 나는 사소한 보고서를 만들 때도 '두 줄'의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문장을 재구성하고 복잡한 논리를 단순하게 하고, 쉬운 단어를 찾기를 꾸준히 연습했다.


나는 그 사수가 그동안 만든 보고서를 쌓아놓고 줄 간격, 자간, 장평, 종이의 여백부터 시작해서 논리 전개 방법, 주제를 강조하는 방법, 사실적 근거를 제시하는 패턴, 한 단락의 길이, 전체 구성의 균형감 등을 분석하고 따라 해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만든 보고서를 우연히 봤는데, 자기가 작성한 것인 줄 알고 놀랐다는 것이었다. 평소 말이 없고 무뚝뚝한 사수의 예상치 못했던 칭찬이었다. 미생에서 김대리가 장그래의 문서를 보고 '이제 됐어'라고 말할 때의 장그래의 표정이 그때의 나와 겹쳐 보였다.  


상급기관에 오니 보고서가 더 중요하다. 의사결정의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파급효과도 크고 이해관계의 충돌도 더 크다. 어떤 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설득해야 할 상대의 힘과 영향력도 크다.


이 모든 것을 헤쳐나가기 위해 내 손에 들려진 유일한 무기는 '제대로 된 보고서'이다. '제대로 된 보고서'를 들고 있으면 어느 누굴 만나도, 어떤 회의도 두렵지 않다. 총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와 같은 직장생활에 오늘도 '제대로 된 보고서'는 나의 방패이자 창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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