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졸거나 취해 있었다
1. 전사 예산과 대내외 사업관리를 하는 사장님 직속 보고 기획팀 막내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일에 대한 요령도 능력도 없었던 나는 언제나 피곤했고, 졸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거나 아니면 술에 취해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2. 온갖 자료의 취합, 프린트, 제본이 내 역할이었는데, 전사 임원회의 보고가 있던 날 하필 사장님 앞에 놓인 자료를 위아래로 뒤집어서 제본했다. 약 20페이지가량 이어지는 뒤집어진 자료에 사장님 표정이 흙빛으로 변하셨다.
3. 임원회의에서는 제본 자료와 동시에 노트북에서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띄웠는데, 노트북 충전선을 깜박했다. 인수인계받던 첫날이라 사수 노트북을 내가 컨트롤하고 있었는데 예상보다 길어진 회의 도중에 노트북 전원이 똑 꺼져버렸고, 심각했던 임원회의의 맥도 내가 그렇게 잘라버렸다. 부랴부랴 전원을 챙겨 와서 허둥지둥 연결했는데, 하필 사수의 노트북 시작 배경화면이 가수 송대관이 하얀 몰티즈를 안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마우스가 작동할 때까지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지는 기간 동안 전사 임원과 사장님이 화면 가득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송대관만 바라보고 있었다.
4. 이쯤 되면 나에게 노트북을 맡기지 않을 법도 한데 팀장님이 전사 임원들 앞에서 발표하는 회의에서 발표자료를 노트북으로 넘기는 일을 했다(인간 클릭커). 프레젠테이션 중에 회의실 불을 모두 꺼두는 바람에 어두컴컴, 아늑한 것이 졸음이 몰려왔다. 조느라 페이지를 넘겨야 할 타이밍을 자주 놓쳤다. 등 뒤에서 팀장님이 다급하게 내 이름을 속삭이듯 외치는 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발표가 모두 끝날 때까지 계속 넘길 타이밍을 놓치거나 졸다가 한꺼번에 마구 넘겨버리거나를 반복했다.
5. 아침 일찍 시작하는 중요한 회의 준비를 해야 하는데 회의 시작 30분 전에 기상했다. 내 생전 그렇게 빠르게 뛰쳐나간 적은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다. 기상과 동시에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튕겨 나와 따귀 때리듯 얼굴에 물을 끼얹고 아이언맨 슈트 입든 옷을 몸에 때려 박은 후 택시 안에서 사람 꼴을 갖췄다. 기적처럼 회의에 늦지 않았다.
6. 클라이언트 회장님(재벌) 차를 타고 이동할 일이 있었다. 기사님이 어찌나 운전을 편안하게 하시는지 잠이 들어버렸다. 회장님이 나에게 말을 거시는 동안 계속 묵묵부담 꿈나라를 헤매다가 느닷없는 시점에 잠이 깨서 운전하고 계시는 기사님께 법인카드를 들이밀었다. 택시인 줄 알았다.
7. 회식 후 택시에 노트북을 두고 내렸다. 같이 택시를 탄 사수가 들어준다고 했던 건데 사수도 나도 취해서 아무도 안 챙겼다. 다음 날 빈손으로 출근해서 팀장님 몰래 사수랑 중고사이트를 뒤졌다. 천사 같은 택시 기사님이 노트북에 붙은 자산 태그를 보고 회사로 연락을 주셔서 너무 행복한 나머지 그날 또 회식을 했다.
8. 중요한 보고 회의에 배석하던 날이었다. 얇디얇은 여름 바지 정장을 입고 계단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회의 직전에 바지가 찢어지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갈아입을 시간도 없어서 무릎 부분이 반쯤 찢어져 너덜너덜한 채로 회의에 참석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엉덩이도 찢어져 있던데, 다들 봤을까?
9. 신입사원 프로젝트 발표를 팀 선배들 앞에서 했다. 10분 발표하고 3시간 동안 모든 선배들이 돌아가며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지적을 했다. '다 고쳐서 내일 다시 발표해'를 3일 연속했는데, 밥도 안 먹고 하루 종일 수정해서 다음 날 발표해도, 구구절절 맞는 얘기만 하는 선배들의 새로운 지적사항이 또다시 3시간 동안 이어졌다. 내가 너무 멍청하게 느껴져서 꾹 참았던 눈물을 화장실에서 쏟았다.
10. 저렇게 엉망진창이었는데도 선배들은 이미 지나간 실수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크게 혼내지 않았다. 하나하나 잘 보고 배우며 회사생활을 시작한 것에 지금 와서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이제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선배가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