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시원하게도 내린다

그런데 짜증이 안 난다

by 케잌

1. 매일 출퇴근하던 시절, 장마철은 괴롭기만 한 기간이었다.

2. 비 맞아 다리에 척척 휘감기는 옷, 불어 터진 우동같이 푸욱 젖어버린 발과 좀처럼 마를 생각을 않는 양말, 축축하고 꿈꿈한 공기와 쉰 냄새.

3. 출퇴근길은 더욱 고역이었다.

4. 사람들 틈새에 끼어 지하철을 타고 있으면 앞뒤 양옆 사람의 우산에서 떨어진 물이 쉴 새 없이 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5. 사무실에 갇혀 지내는 동안에는 밖에서 비가 내리든 폭풍우가 휘몰아치든, 꽃이 피든 지든 눈이 오든 그치든 세상 날씨가 도무지 나랑 상관이 없었다.

6. 어느 쪽이 더 싫은 건지 모르겠다.

7. 요즘은 비가 내리면 일단 창문을 활짝 열어 빗소리를 듣는다.

8. 블루베리를 잘 씻어 챙겨 들고 집 뒤쪽 정자에 앉아 바람을 타고 분무기처럼 얼굴에 뿌려지는 빗방울을 느끼고 보고 들으며 오물오물 달콤한 과일을 씹는다.

9. 나쁜 날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나쁜 기분을 날씨에 입히는 거였나 보다 생각한다.

10. 요즘은 장마가 싫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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