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마어마하게 의미 있는 것만 기억에 남는 게 아냐
1. 대학생 때 수학 과외 학생 중 글씨 쓰기를 지독히도 귀찮아하는 학생이 있었다.
2. 특히 틀린 글씨를 지우고 다시 쓰는 상황을 극도로 싫어했는데, 어떻게든 지우지 않고 그 위에 꾹꾹 눌러 덮어쓰려고 애를 썼다.
3. 풀이를 통째로 지워야 할 때면 마지못해 샤프 끝에 달린 손톱만 한 지우개로 지우는 시늉을 한 다음 덧쓰기를 반복했다.
4. 사실상 아무것도 지워진 게 없는데, 고집스럽게 덮어쓰기를 반복하다 보면 도무지 뭘 쓴 건지 알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5. 그 애에 대해서는 이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6. 수학을 잘했는지, 성격은 어땠는지, 이름이나 외모, 나랑 공부할 때 몇 학년이었는지도 전혀 기억에 없다.
7. 내친김에 떠올려 보자면 중학교 때 어떤 친구는 그의 독특한 글씨체(모음의 아래로 긋는 선을 죄다 물결처럼 구불구불 흔들어 썼다)로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8. 무엇을 기억에 남길 것인가, 누군가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는 의도하거나 예측하기 어려운 랜덤한 일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9. 그 누구도 자신을 ‘저는 틀린 글씨 지우기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또는 ‘저는 아래로 긋는 선을 물결처럼 씁니다’라고 소개하진 않을 텐데, 나는 오래도록 그들을 이런 사소한 특징으로만 기억하고 있다.
10. 나 역시 내가 그동안 증명하려고 아등바등 애써온 어떤 가치가 아니라, 어이없는 사소한 조각으로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