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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연 Oct 25. 2022

그만둘 수 있는 용기

명랑한 은둔자 - 캐럴라인 냅





  언제부턴가 가만히 앉아서 영화 한 편을 다 보지 못하겠다.

짧고 굵게 치고 빠지는 유튜브식 영상에 길들여져 버린 것일까. 아니면 영화는 어차피 결말이 정해져있으니 결국 짜고 치는 것처럼 느껴져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만큼 극단적인 냉소주의가 돼 버린 것일까.


  영화를 대하는 나의 자세가 20대 때와는 사뭇 달라진 걸 느낀다. 한 때는 영화관에 걸려있는 영화 대부분을 봐야 직성에 풀릴 정도로 소위 트렌드를 쫓았었다.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같은 시리즈물을 전부 챙겨보기도 했고 (공포를 제외한)장르별로 영화들을 쭉 적어놓고 의무적으로 찾아봤던 적도 있다.

연인이 있을 때는 데이트를 하기위해서라도 타임킬링용으로 찾아보기도하고 혼자있는 시간에는 스스로 보는 영화들을 쌓아가면서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기도 했었다. 아니 그렇게하면 지적으로 성장하는 줄 알았다.(그것을 얼마나 내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키느냐에 달려있었는데 말이다.)

어쨌든 영화와 가깝게 지냈던 시절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모든 것에는 시절인연이 있는 법. 어느 순간부터인지 꼭 필요한 영화가 아니고서야 잘 찾아보지 않게됐다. 대신 책을 읽는다.


  시절인연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 때 그 때 나와맞는 사람과의 인연도 있겠지만 물건, 그리고 책, 하다못해 습관과의 인연도 있는 것 같다. 사람이 살면서 성격이 몇 번은 바뀐다는데 아마 그 흐름의 일종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경우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향이 왔다갔다 한다.

어느 시기에는 사람 만나는게 즐겁고 기다려져 끊임없이 주말을 위한 약속을 잡는가하면 또 어느 시기에는 혼자 맹렬하게 동굴을 파고 들어간다. 약속을 최소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있던 약속도 어떻게하면 취소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책 <명랑한 은둔자>의 저자 캐럴라인 냅도 이런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밝혀적은 부분이 있다.


전화가 울린다. 받을까 말까 망설인다. 으, 사람들이랑 이야기하는 건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든단 말이야. 저녁약속이 일주일 뒤로 다가온다. 마음 한 구석에선 가고 싶으면서도 나는 빠져나갈 계획을 짠다. 어떻게 하지? 아픈척 할까?


  

  나같은 사람의 특징은 막상 현실로 닥치면 또 나름 그럭저럭 잘 해낸다. 하지만 만나기 전에는 사람이 싫고, 가기 전에는 출장이나 여행이 귀찮아 죽겠다. 회피형으로 지내는 시간이 거듭될 수록 어쩐지 스스로가 고립돼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말이다.


아무런 사교활동 계획이 없는 또 한 번의 고독한 밤. 그 전망에 나는 안도감에 막연한 압박감이 섞인 기분으로 마음이 흔들린다. 내가 은둔의 밤을 하루 더 견딜 수 있을까?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약속을 잡아야 하나? 다섯번 중 네 번은-다섯밤 중 네 밤은-고립의 목소리가 이긴다. 집에 머무르는 것이 더 쉬우니까. 외롭겠지, 하지만 더 안심된다. 훨씬 더 안심된다.




  심신으로 컨트롤 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인맥을 유지하는 것은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 다만 인간관계는 역시나 흐르는 물처럼 유동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 치 앞도 예측할 수가 없어서 그 얼마없는 인맥이나마 잘려나갈 우려가 항상 존재한다. 관건은 그 때마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제 페이스를 유지해 나가는 것인데 그것은 대개 심리적 요인에 달려있지만 때로는 신체적인 문제로부터도 부정적인 영향이 촉발되기 때문에 역시 가변적이다. 한 마디로 내 마음도, 처지도 그 때 그 때 변한다는 것이다.


  캐럴라인 냅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고독과 고립의 경계선은 무척 가늘고 모호하며 우리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다.


  이렇게도 말했다.


고립은 또한 음흉하다. 우울증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것은 잡초처럼 슬금슬금 자라나서 당신을 붙들고는 다시는 놓아주지 않는 어떤 마음상태다. 당신은 한동안 혼자 지내며 그저 고독할 뿐인데. 그러다 어느 새 고립된다. 당신은 만족하고 있는데. 그러다 어느 새 외롭다. 당신은 스스로 잘 통제하고 있다고 믿는데. 그러다 어느 새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상태에 갇힌다.



  쓰고보니 철학적인 얘기가 됐지만 결론은 사람 마음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대응책을 마련해 둬야 하는데, 나같은 성향과 성격은 그 마저도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마음근육을 평소에 단련시켜 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온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깊이 빠져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그 어떤 것에도 과몰입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가능한 건 아니다. 실패의 경험이 다소 필요하다. 맹목적인 복종이나 집중, 노력을 해봤던 사람이 오히려 좀 더 그것들을 떨쳐 내기가 쉽다. 고독이 고립이 되기 전에 말이다.


고독은 차분하고 고요하지만, 고립은 무섭다. 고독은 내 경험상 자칫하면 미끄러지는 경사로다. 처음에는 안락하게 느껴지지만 종종 아무런 경고도 자각도 없이 훨씬 더 어두운 것으로 변신할 수 있는 상태다.


그러면 저자가 말하는 위험 감지 상태에 속하지 않고, 또 속했다 하더라도 빠져나오기가 상대적으로 쉬워질 것이다.


자신을 훨씬 더 잘 인식하게 되었고 자신에게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필요할뿐 아니라 그것을 자신이 즐긴다는 사실도 더 또렷하게 느끼게 되었으며 그 시간에서 공허함이 아니라 뿌듯함을 느끼는 능력도 더 기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고독과 고립의 차이이다.




  한 동안 영화를 보지 않다가 아무런 약속을 잡지 않은 어느 주말 오랜만에 영화 한 편을 봤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다. 책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작가인 J.D.샐린저가 소속된 작가 에이전시에 인턴으로 근무했던 사람이 쓴 회고록 <마이 샐린저 이어>라는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영화를 소개해 놓은 글을 보면 문학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고도 했다. 언젠가 글이나 책, 문학과 관련된 피드가 많이 올라오는 내 SNS 채널을 들여다보다가 우연히 알게돼 적어두었다가 봤다.


  영화는 끝날 때까지 잔잔했다. 아무런 자극적인 장면 하나 없이, 등장인물들의 과격한 감정변화 하나 없이 그랬다. 좋게말해 잔잔이지 그냥 밋밋했다.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모노톤의 동요없는 이야기의 흐름이 진짜 세상과 비슷하게 전개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실화를 바탕으로 해서 그런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거나 똥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는 삶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들은 나른했다. 야무지게 적금을 부으며 본인의 경제적 상황을 꾸려나간다거나 직장에서 실질적인 이득을 취하려고 아등바등하는 인물은 없었다. 대신에 주인공은 참 많이 서툴고 손해보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데도 꾸역꾸역 오늘과 내일을 살아냈다.


  어디선가 읽은 글에 따르면 '사는 곳, 만나는 사람, 하는 생각' 중 한 가지를 바꿔야 내 삶이 바뀔 수 있다고 했다. 영화 속 주인공은 결국 다니던 직장인 작가 에이전시를 그만두었고, 서로에게 위안이 될 수 없다는 걸 인지했으면서도 꾸역꾸역 가느다란 선으로만 간신히 연결 돼 있던 남자친구와도 결국 헤어졌고, 본인 삶에 만족해 했던 안일한 생각도 바꾸었다. 세 가지 모두를 바꿔서 인생 자체를 바꿔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 때 영화는 끝난다. 주인공의 미묘하게 달라진 표정과 발걸음과 함께.



  나이가 들면서 무언가를 바꾸거나 그만둘 수 있기까지가 참으로 힘든 것 같으면서도 또 쉽다.

오래 고수해 온 성격을 바꾸기는 힘들지만 각자의 먹고사니즘에 바쁘고 지쳐서 오랫동안 유지해 온 친구와의 관계가 한 순간에 금이가기는 또 쉽다. 취업하기는 몹시 힘들어도 그 안에 들어가서 한 없이 기쁠 줄만 알았는데 또 너무쉽게 좌절하기도 한다. 이렇게 왔다갔다 하는 사이 시간은 흐르고 세월은 간다.


  서른이 넘은 이제와서 나의 성격 중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부분을 들어올려 마치 다른 새로운 파일을 끼워넣듯 바꾸기는 힘들지만 그것에 대한 인지는 조금씩 달라짐을 느끼고 있다.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느껴왔는데 알고보니 그것이 결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내가 아니라고 (근거가 없어도)확신해왔던 것들이 아닌게 아니었음을 알게되는 근거들이 보이게 될 때 인생은 몹시 불안해진다. 위태롭다.


나는 내 수줍음이 내게만 영향을 미친다고 여기며 40년 가까이 살아왔다. 이 문제로 불편한 사람은 나야, 자의식과 불안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나야. 나보다 덜 수줍어 하는 사람들은 나보다 편안하니까 그들이 나를 봐줘야해 하고 생각했다.


  캐럴라인 냅도 본인의 '수줍은' 성격을 옹호해왔지만 결국 이웃이 스치듯 했던 한 마디에 스스로 균열이 생겼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사람들은 좀 헷갈린다는 이웃의 말을 듣고보니 좀 까다로운 의문들이 떠올랐다. 수줍어하는 사람들이 비록 부지불식간이긴해도 특수한 형태의 힘을 휘두르는게 아닌가 하는 의문, 어떤 사람의 수줍음을 본인만 경험하는게 아니라 그의 주변 사람들도 (수줍음을 타든 안 타든)경험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


  책을 읽으면서 가장 굵게 여러번 밑줄 긋고 싶었던 부분 중 하나다.



  내가 나름대로 믿어왔던 신념 같은 것들이, 의외의 인물이나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 속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직면했을 때. 반박하고 싶지만 스스로도 나조차 흔들리고 있음을 느낄 때. 저자는 '의문'이라는 완곡한 표현을 썼지만 어쩌면 깜짝 놀라서 상처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역시 일희일비 하지 않는다는 공식을 적용하면 마음이 편하다. 그 때의 나는 그랬고 지금의 나는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이라고 되뇌이면서.



  아무생각없이 상처주는 상사에게, 그 간의 정이 있지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도 안되는 행동을 하는 친한 지인에게, 모범을 보여도 시원찮을 판에 오히려 갈등을 조장하는 선배에게, 잔꾀 부리는 후배에게, 일일이 대응하거나 화내지 않아도,

  결국 그들은 스스로 화를 자초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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