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문학은 지루하다. 지인을 붙잡고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을 수만은 없다.
그렇지만 나는 문학을 사랑한다. 언젠가 내게도 책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우리가 누리는 생활과 활기와 문학사이의 괴리감, 그 간극을 좁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가벼운 소재로 시작해 다 읽고 나면 왠지 모르게 몸에 온기가 도는 그런 문학의 매력을 다들 느낄 수 있게 말이다. (내가 뭐라고)좀 더 사람들 사이에 문학이 스며들게해서 그만큼 만연해 질 수 있게 표현해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오늘 날씨 춥다"를 말하는 정도의 만연함까지는 아니더라도, "요즘 뭐 읽어?"라는 안부가 이상하게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면 욕심일까. 글은 꾸준히 생산되는 스테디셀러지만 트렌드를 이끄는 트렌드세터가 되지는 못한다.
알코올을 좋아하지 않거나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인 '비주류'가 우리나라에서 희귀하듯이, 책을 가까이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사실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홀로 외로운 도전장을 내밀고서 '문학을 세상에 전파하리라!' 하고 전투에 맨몸으로 뛰어든 용사가 있었으니, 바로 1992년생 이슬아 작가다.
이슬아 작가를 처음 접하게 된 건 3년전 쯤이다.
'아무도 안 청탁했지만 쓴다!'
SNS를 하다가 우연히 그녀가 스스로 만든 홍보글을 봤는데 자신의 글을 구독하라는 내용이었다.
자기한테 구독료 만 원을 내면 본인이 쓴 글을 매일, 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유명한 작가도 아니고, 들어본 적도 없으며, 화려한 홍보 포스터 속에서 스스로를 홍보하고 있는 이 자는 누구인가? 하는 마음과 함께 호기심이 일었다. 그리곤 기꺼이 구독했다. 넷플릭스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구독경제를 접하게되는 순간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슬아의 글은 매우 재미있었다. 만 원이 아깝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인식해 온 '문학=고루함'이라는 공식을 깨 버릴 정도로 트렌디하고 세련되기까지 했다. 글이 이럴 수 있다니. 읽고나면 만족감이 들 수 있다니. 사실 현대문학에서는 만족스러운 글을 찾기가 좀처럼 쉽지 않아서 고전으로 눈을 돌리곤 했었는데 말이다.
이슬아는 그렇게 매일같이 수필을 발행해 기꺼이 만 원을 내고 본인 글을 구독하는 독자들에게 보냈던 글들을 엮어 <일간 이슬아 수필집>도 냈다. 나는 메일로 구독해서 봤었음에도 책도 샀다. 종이로도 또 한 번 읽는 맛을 느끼기 위해서였다.(책 표지도 특이하고 예쁘다!)
이후 이슬아는 종횡무진했다.
3년전 쯤 포털사이트에 그녀 이름을 검색했을 때 몇 페이지 없던 관련글이 지금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슬아 작가는 누구도 붙여주지 않은 작가라는 명함을 스스로 만들었다.(등단 작가도 아니다.) 그리고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위해서 '매일같이' '잘' '열심히' 썼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그녀는 하나의 장르가 됐다.
운동할 때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초체력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처럼 그녀도 글의 기초체력을 다졌다. 어렸을 때부터 글방에 다니면서 열심히 글을 썼다고 했다. 글을 쓰고 읽던 어린이는 어른이 되어 누군가에게 다시 글을 가르친다. 글방을 운영하며 만난 아이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썼던 글과 느낌들을 정리한 책이 <부지런한 사랑>이다.
이슬아가 쓴 책을 읽고 있으면 세련된 글을 쓰는 그녀의 글체력이 느껴진다. 본인이 배웠던 글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직접 가르치게 된 본인의 글방에서도 이슬아는 계속해서 가르치면서도 생각하고 또 가르치면서도 쓴다.
말하는 사람 모두에게 말투가 있듯 글쓰는 사람 모두에게 글투가 있다. 글투는 문체이기도 하고 '이야기를 하는 표정'이기도 하다. 과제에서 이름을 지워도 글쓴이의 표정은 지워지지 않는다.
'글투를 발견하고 수호하고 추가하는 것'이야 말로 글쓰기 교사의 의무 중 하나일 것이라고 되뇌인다.
이슬아의 글을 가만히 읽고있으면 꾸준함과 성실함이 결국 무엇이든 이긴다는 걸 스스로 느끼게되는 순간이 온다. "무언가를 계속 좋아할 수 있는 능력이 재능"이라며 언젠가 모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예를들어 글을 잘 못 쓰는데 글 쓰는 수업을 너무 좋아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좋아하는 마음 자체가 진짜 재능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쓰고 또 계속해서 쓰다보면 뭐라도 된다는 것이다.
3년 전 그녀를 처음 접하게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도 회사를 때려치고 싶은 순간마다 꺼내어보던 생각이다. 당장이라도 사표를 날려버리고 싶지만‥참고 일하다보면 뭐라도 돼 있겠지. 하다못해 월급이라도 모이겠지 생각했다.
비건 지향 생활을 시작한 뒤부터 이 시대의 영상들을 새롭게 감각하게 된다. 비건은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 것뿐 아니라 나와 타자가 맺는 관계를 돌아보고 다시 설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무엇을 먹을지에 대한 고민 만큼이나 무엇을 볼지에 대해서도 여러 고민이 생긴다. 유튜브 시대를 나의 글쓰기 수업에서도 실감하는데, 많은 아이들이 유튜브에서 본 영상에 대한 글을 써오기 때문이다.
사람이 늘 새로울 수만은 없는데 이슬아는 늘 신박한 글을 세상에 내놓아 트렌드를 이끈다. 늘 저렇게 생각하고 사고하고 그래서 그런가보다고 생각했다. 새 삶의 방식과 그에 수반되는 새로운 관점. 그리고 글을 통해 수행해 가는 방식.
외면하는 능력은 자동으로 길러지는 반면, 직면하는 능력은 애를 써서 훈련해야 얻어지기도 한다. 무엇을 보지 않을 것인가. 무엇을 볼 것인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며 수업에서 나온다.
아무리 신박하다고 해도 나는 왜 수 년 째 이슬아의 글에 빠져있는가. 생각해봤다.
글이 씩씩하다.
쓰고 싶어진다.
이슬아의 글을 읽다가 조용히 노트와 펜을, 노트와 연필을 꺼내어 든 적이 여러번 있다. 그렇게 일단 쓰기 시작하면 내 안에 근본없이 마구 흐트러져 있던 우울함들이 조금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결국 기분이 좋아진다.
이슬아도 글이 가지고 있는 치유기능을 인정했다.
나는 치유를 위해 글을 쓰지 않지만 글쓰기에는 분명 치유의 힘이 있다. 스스로를 멀리서 보는 연습이기 때문이다.
실제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도 우울함의 치유 방법 중 하나로 일기쓰기를 제안한다고 한다.
하루 중 감사한 일들을 3가지 정도 찾아 짧게 쓰며 차곡차곡 쌓아가는 '감사일기'라는 것도 있다. 아침마다 남들보다 한 두시간 일찍 일어나서 미래를 설계하는 이른바 '미라클 모닝'도 아침에 쓰는 일기에 기안한다.
글을 쓰고 또 쓰다 보면 일종의 '글근육'이 생기는데 그것이 생기면 평소에 우울하게 느끼던 것도 조금은 덜 우울하게 느낄 수 있다. 조금은 타자화 한다고 해야할까. 그것을 느낀적 있다.
그래서 쓰고 또 쓰게 되니까 어느 순간 글쓰기도 중독이 된다. 근데 잘 쓰려면 읽어야 한다.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많이 읽게 되고 읽고 쓰고 읽고 쓰고를 반복하다보면‥ 그렇게 슬픈일들이 잊혀져 간다. 글근육이 마음의 근육이 된 채로 나를 위로하고 있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마치 내 슬픔을 제3자의 슬픔을 보듯 할 수 있는 힘도 생긴다. 조금 더 단련이 되면 아예 잊을 수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을 지 모른다.
울고 싶지않을 땐 그래서 쓴다.
이슬아는 그것을 치유라고 본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멀리서 보는 연습'을 하면,
그 연습을 계속한 사람들은 자신을 지나치게 불쌍히 여기거나 지나치게 어여삐 여기지 않는 채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자기 연민의 늪과 자기애의 늪 중 어느 곳에도 빠지지 않고 이야기를 완성하여 독자와 관객에게 슬픔과 재미를 준다. 혹은 두 가지를 동시에 준다. 자신 말고 타인이 울고 웃을 자리를 남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을 이야기로 초대하는 예술'이 된다고 했다.
이슬아 작가에게 빠졌던 2019년의 어떤 나날들.
그 이듬해 나는 '문보영'이라는 작가를 접하게 돼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고, 그 다음에는 '캐럴라인 냅'을 접하게 돼 또 다른 관점을 만들어 가고 있다. 좋은 기운은 또 다른 좋은 기운을 몰고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