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 <Trace> (2020)
2020년, 우리는 이전과 많이 다른 삶의 형태에 녹아들어야 했다. 2년이 지난 지금 그 형태에 꽤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이 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은 두려움에 부딪혔고 두려움은 곧 무기력함이 되었다. 무기력함의 거처는 그저 집이었다. 그래서인지 별다른 이유 없이 청소하는 날이 많아졌다. 당시 유행했던 미드나잇 블루 컬러로 오래된 벽지에 덕지덕지 칠하고, 가구들을 이리저리 옮기며 사소한 새로움을 찾으려 애썼다.
가구들을 옮기다 보면 생각지 못했던 것에 눈길과 손길이 멈추고는 한다. 그것들은 대개 한 번 봐서는 출처와 탄생연도를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내 손에 의해 내 물건이 되었을 때의 추억을 겨우겨우 꺼내는 데 성공해야만 생각이 난다. 페인트칠을 하고, 가구들을 옮기고, 잊고 있던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주로 아빠와 함께 했다. 새로움을 찾자고 시작한 청소가 먼지 냄새 폴폴 나는 추억 여행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 엄마보다는 아빠에게 감출 것이 더 많아진 나는 딸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아빠와의 대화가 줄어들었고 한 공간에 둘만 남으면 어색함마저 감돌았다. 그랬던 우리에게 청소라는 아주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다. 대대로 물건을 잘 못 버리는 우리 집에는 몇십 년 동안 쌓인 추억들이 있었고 그걸 안주 삼아 청소하는 내내 떠들었다. 특히 많은 이야기가 오갔던 물건은 아빠의 군대 시절이 담긴 사진 앨범이었다. 홀쭉하다 못해 ‘왕’자까지 새겨져 있는 아빠의 배. 흰 난닝구를 괴롭힐 기세로 불룩 튀어나온 지금의 배는 다 어디서 온 걸까 생각하며 배를 잡고 웃었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빠의 일기장을 열어보고 싶다는 생각. 아빠가 적어 내린 청춘의 글자들과 지금의 글자들을 읽어보고 싶었다. 물론 아빠의 일기장을 볼 수 있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지만 말이다. 대신 그 내용을 조금이나마 짐작케 하는 한 앨범이 있다.
1. 물
이적의 락 보컬과 사운드를 애정한다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곡. 콘서트 중 물을 마시기만 하면 환호하는 관객들을 생각하며 썼다고 한다. 이 곡이 <Trace>의 포문을 여는 이유는 아마도 공연에 대한 이적의 갈증 때문이 아닐까. 덕분에 콘서트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팬들의 갈증도 잠시나마 씻겨나간다.
2. Whale Song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망망대해 한가운데 놓인 내가 있다. 그리고 나를 잡지도 놓지도 않는 파도가 친다. 나는 파도를 믿고 다시 눈을 감는다.
이적의 목소리가 마치 그 파도 같다. 어디로 이끌리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은 믿게 되는. 바다를 관망하는 이의 노래라기보다는 바다 그 자체가 노래하는 듯한 곡.
3. 흔적
이적은 정규 6집을 가장 잘 담은 곡으로 이 곡을 뽑았다. Trace, 흔적. 이 앨범을 들으며 아빠와의 에피소드를 떠올린 것도 8할은 이 곡 때문이었다. 아빠의 글자들을 읽는 것만 같은 목소리와 담담하게 그 목소리를 들어주는 듯한 통기타 사운드. 언젠가 아빠의 일기장을 보게 된다면 이 곡을 들을 때 느꼈던 감정들이 떠오를 것만 같다.
삶의 흔적들을 남긴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들 한 명 한 명이 누군가를 기억함으로써 누군가의 흔적이 되어줄 수는 있다.
4. 돌팔매
패닉의 왼손잡이 25년 후를 노래한 곡. 모두가 똑같은 손을 들 때 왼손을 들었던 그 청년이 어느새 중년이 되어 2020년에 왼손을 드는 아이의 손을 잡아준다. 아이를 이해할 수는 없을지언정 아이가 말할 수 있는 권리는 지켜주겠다는 다짐.
다름을 이해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고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름을 이유로 돌을 맞는 누군가가 있다면, 우리는 그의 편에 서서 함께 돌을 막아주어야 한다.
다름의 기준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나도 다른 한 존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다른’ 우리들은 연대해야 하고 다름을 ‘틀린’ 것으로 이야기하는 이들에게 맞서야 한다.
(+) 언젠가 또 대한민국에서 올림픽이 열린다면 테마곡으로 쓰였으면 좋겠다. 인류애를 들끓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곡.
5. 당연한 것들
멜로디와 가사를 완성함과 동시에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했던 코로나 위로송. 최대한 빨리 코로나에 지친 이들과 그 마음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웃는 것도 힘내서 해야 하는 일이 되어버린 그때와 지금, 자꾸만 당연했던 것들에 대한 미련이 생기는 건 왜일까. 언젠가 돌아올 그 당연함들을 더 이상 당연히 여기지 않겠다는 소박한 다짐을 하며 듣게 되는 곡.
6. 숨
감정은 내가 느끼는 걸까, 감정이 나보다 먼저 생겨나는 걸까.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지만 감정이란 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인간은 다양한 이유로 자신을 억제하며 살아간다. 그 때문에 나도 모르게 말라가는 감정들이 있다.
하지만 어느 한순간, 내 몸에서 끓어 나오는 불덩이를 주체하지 못할 때가 있다. 지독하게 사랑하고, 지독하게 미워하고, 지독하게 아파하고. 아주 가끔은 그런 원초적인 우리들을 발견하는 일도 인간으로서의 삶에 한 부분이 아닐까.
7. 한강에서 (interlude)
Side B면의 시작. 이 앨범을 LP로 듣지 못하는 게 천추의 한이다. 대신 한강을 거닐 일이 있다면 꼭 함께 하고 싶은 곡.
8. 민들레, 민들레
이적의 봄 같은 곡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꿈꾸는 봄 같은 삶을 그림처럼 그려낸 곡. 개인적으로는 아빠의 어린 시절을 상상케 하는 넘버이기도 하다. 청소할 때 말고 아빠와 이야기꽃이 피어나는 때가 또 있다. 어릴 적 시골에 살며 겪었던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때 아빠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깔깔 웃는다. 흙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수없이 보았을 민들레 씨를 보며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9. 밤
연극의 숨 막히는 독백을 듣는 듯한 곡. 익숙지 않은 곡 진행에도 불구하고 이적의 글자들이 빠짐없이 귀에 박힌다. 어둠의 동반자인 불안과 어둠의 그림자인 우울은 자꾸만 밤을 데려온다. 해가 뜨는지도 달이 지는지도 모른 채 끝없는 불면을 앓는 이의 절규를 듣는 것만 같다.
10. 숫자
<흔적 Part2>의 타이틀곡. 생각해보면 우리는 많은 것들에 숫자를 매기는 일을 좋아하는 것 같다. 기록을 남겨두면 추억이 된다지만, 숫자로만 남은 기록은 어쩐지 씁쓸함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정겹기만 한 기타 소리가 왠지 씁쓸하게 들린다.
11. 준비
언젠가 우연히 아빠의 고민을 들은 적이 있다. “20년 넘게 해온 일이 있지만, 그래도 다른 일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때의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20년 동안 했던 일에도 흔들림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지금의 나는 1분 1초 무수히 흔들리며 아빠의 고민을 곱씹는다.
12. 나침반
<흔적 Part1>의 타이틀곡. 이적은 나에게 아빠 같은 아티스트이다. 이적의 음악은 무한한 든든함과 믿음을 안겨준다. 어느 때든 등을 내어줄 것만 같은. 그런데 그 등이 유독 아프게 느껴질 때가 있다. 자신이 가진 나침반으로 나에게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고, 정작 본인은 내 눈빛을 나침반으로 삼는다.
오로지 내가 기준인 삶. 절대 그 삶을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계속 궁금해하고 싶다. 아빠로서의 삶, 한 남자로서의 삶, 한 인간으로서의 삶. 아직 물어볼 용기는 없지만 아빠에게 이적의 앨범을 들려주며, 아빠의 일기장을 읽는 것만 같았다고 이야기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물론 이적이라는 아티스트에게도 꼭 전하고 싶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