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가지 않는 우리들

하찮은 소신발언 두 번째

by 달여름

우리는 늙어가기만 합니다. 시간은 앞으로만 가요. 실재하는 모든 것들의 악역을 자처하죠. 절대 내 편이 되어주지 않고 그렇다고 남의 편이 되어주지도 않습니다. 고고한 자세를 유지한 채 우리를 관망하기만 해요. 우리는 그의 눈치를 보며 억지로 발걸음을 재촉할 뿐입니다. 하지만 시간의 세계에 등을 돌리고 반대로 걸어가는 이들도 있어요. 이들은 반역자인 동시에 선구자가 됩니다.


"시간이 지배하는 세상에 산다는 이유로 왜 늙어가기만 해야 돼? 뭐든 젊은 게 좋잖아. 젊어갈래!"


모두들 젊음을 원해요. 얼굴도 마음도 몸도, 말도 생각도 걸음도. 필히 늙어가는 운명을 타고났음에도 젊음을 추앙하죠. 젊음은 새 것과 가까워지고 늙음은 낡은 것과 가까워져요. 낡는다는 건 공포예요. 헐고 너절해지면 아무도 찾아주지 않죠.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니까요. 우리는 젊어가기 위해, 새로움에 가까이 있기 위해, 갖은 방법을 씁니다. 젊어갈 수 있다는 건 시간이라는 빌런에게 이기는 거나 다름없을 거예요.

하지만 희망으로 부풀었던 우리는 곧 좌절합니다. 어느새 늘어있는 주름, 편해서 계속 입게 되는 유행 지난 착장, 요즘 애들이 잘 쓰지 않는 말투, 조금씩 삐걱거리는 어깨와 무릎. 영생의 기적이 찾아오지 않는 이상, 우리는 평생을 시간에게 져야 해요.


여기서 잠깐, 시간 입장은 어떨까요. 어리둥절하겠죠. 시간이 생각하기에 본인은, 사람들이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시간이 없다면 존재의 의미도, 성장의 의미도, 생존의 의미도 다 소용없어지는 건데 말이에요.

시간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나침반과 같아서, 삶의 흐름을 안내해요. 애초에 어떤 삶을 사느냐는 내 선택에 달린 문제였고 시간은 그저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죠. 시간의 눈치를 봤던 건 우리였고, 발걸음을 재촉한 것 또한 우리였어요. 그런데 빌런 취급이라니요. 시간은 우리가 꽤나 괘씸할 거예요.


사실 다들 숨기고 있잖아요. 공장 냄새가 나는 새 것보다는 내 체취가 묻어있는 낡은 것이 좋고. 잘 모르는 것보다는 잘 아는 것에 안정감을 느끼고. 가끔은 시간을 거스르기보단, 그저 따르고 맡기고 싶은.


"시간이 다 해결해줄 거야."


얼마나 든든해요. 시간은 절대 멈추지 않아요.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죠. 우리는 그 시간을 믿고,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돼요. 평생 젊어갈 순 없지만, 젊음의 순간들은 차곡차곡 쌓여요. 그 순간들이 모여 거대해진 나는, 어느새 시간과 한 몸이 됩니다. 새로 태어날 한 어린 아이의 거대한 나침반이 되어가는 거예요.

시간은 한 선으로만 흐르지만, 우리의 몸에는 태어나고 걸음마를 떼고 학교에 입학하고 첫 취업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부모님과 함께 늙어가고 있는 모든 시간들이 혼재하니까요.


우리는 늙어가는 게 아니라, 한 줄기의 시간이 되어 흘러가고 있는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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