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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우사랑 May 03. 2019

인생의 베일 - 서머싯 몸

어디까지를 고전으로 볼 것인가?

얼마 전부터 시작한 도서관 공감 독서 함께 읽기, 세 번째 책, 인생의 베일.


- 오늘도 5줄 줄거리 요약부터


아름다운 주인공 키티는 동생의 결혼과 나이에 떠밀려 사랑하지 않는 월터와 충동적으로 결혼하고, 불만족스러운 생활을 이어나가던 중 매력적인 유부남 찰스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이라 믿었던 찰스에게 배신당하고, 남편의 협박에 못 이겨 콜레라가 창궐하는 중국 오지로 떠나게 된다. 이곳에서 죽음 앞에 선 사람들로부터 진정한 삶의 자세를 깨달아 가게 되고 정신적으로 성장한 키티. 콜레라로 월터가 갑자기 죽고 돌아온 고향에서 찰스를 만나 다시 욕망에 흔들리기도 하지만, 그뿐. 더 이상 욕망에만 올인하던 예전의 키티는 아니었다.


하! 아직 어려운 5줄 줄거리 쓰기. 그래도 저번 책(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에 비하면 한결 수월 했다. 이것도 하다 보면 나아지리라.


- 함께 읽기


키티는 왜 키티인가? (순수한 사랑에 목매던 전반부엔 어울리지만, 정신적 성장을 이루는 후반부엔 이름이 너무 경박스러워 보이지 않나?라는 의견이 있었다) 이야기의 무대가 왜 영국이 아닌 영국령 홍콩일까? (그 시대에 불륜은 커다란 일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도 좋을 장소 같은 것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하는 의견과 작가의 삶의 배경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 "결국 죽은 건 개였어"라는 월터의 마지막 말이 의미하는 건? (개가 월터 자신을 의미하는 의견이 많았나? 기억이...) 키티는 다시 만난 찰스에게 다시 자신을 허락하고 마는데, 그것이 그저 욕망이라면 정신적 성장과는 완전히 개별적인 일이 될 수 있는가? (선생님은 타 독서 모임에서 40대들을 통해 그럴 수 있다는 의견들을 듣기도 하셨다고)


책의 물성과 같은 작은 것에서부터, 삶의 가치와 같은 정답은 없지만 다양하고 끝없는 얘기들이 쏟아져 나오는 커다란 문제들까지를 듣고 말하는 일은 역시 재미(?) 있었다. 어떤 책을 다루느냐에 따라 저번 시간에 봤던 그 사람이 이번 시간엔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는 점은 특히 놀라웠다. 독서 모임은 그렇게 사람에 대해 가질 수 있는 편견도 깨뜨리는 일이었다. 비슷비슷한 대화들만 하는 또래들 사이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 경험 같은 것. 아마 또래들이 문제가 아니라 '책'이 가진 힘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 인생의 베일


"오색의 베일, 살아 있는 자들은 그것을 인생이라고 부른다." - 셸리


인상적인 도입부를 읽기 전에, 아마도 우리나라 제목에 영향을 주었을 이 문장을 먼저 읽을 수 있다. 책의 원 제목은 The Painted Veil. Painted는 흔히 알고 있는 색칠한 외에도 겉치장한, 허식적인, 공허 한과 같은 뜻도 있다. 적당히 베일에 가려져 있을 때 인생이 아름답다는 말로 해석해도 괜찮을까? 키티의 입장에서 본다면 베일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사랑의 실체는 적어도 꿈꾸던 순수와는 거리가 멀었으므로.


나는 이 책을 세상 물정은 모르고 사랑에만 올인하는 순수하고 철없는 여자의 정신 성장기로 읽었다. 무가치한 삶에 회의하고 가치 있는 삶으로의 전환을 꾀하는 키티에게 무한 응원을 보내면서 읽었달까. 그런데 어떤 분은 부모의 영향에 방점을 찍고 읽으셨다. 키티가 그렇게 자라난 것은 비교하고 부추기는 엄마의 영향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맞다. 그런 부분이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들의 영향으로 이렇게 된 게 아니에요. 그저 아직 정신적으로 완전히 성장하지 못한 것뿐이에요, 그래서 지금도 열심히 나아가고 있는 거예요, 하는 그런 개인적인 마음 말이다. 어쩌면 이것이 감춰두고 싶은 내 인생의 베일 같은 것일까? 누구나 각자가 가진 베일이 존재할 것이다.


인생의 베일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대부분 희망이나 평화 같은 것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대부분은 그 베일이 사라졌을 때,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므로 그런 면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절망이라 한다면 베일에 가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희망이라 생각하고 쫓아가는 현재를 오히려 행복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알겠지만, 평화는 일이나 쾌락, 이 세상이나 수녀원이 아닌 자신의 영혼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답니다." (p.190)


그러니 아마도 행복, 희망, 평화와 같은 것들은 베일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 하나 더, 어디까지를 고전으로 볼 것인가.


이번 독서 모임에선 개인적으로 이 문제가 가장 흥미로웠다. 평소에 자주 생각해 보던 문제였으므로.


서머싯 몸의 책들(이 책을 포함해 면도날, 달과 6펜스, 인간의 굴레에서, 등)은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서머싯 몸은 "감사합니다. 당신의 책을 읽으며 사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재미있게 볼 수 있었습니다."라는 편지를 받기도 했었다고. (당시의 책들은 그렇게나 어려운 책들 뿐이었나 보다)


쉽고 어려움을 고전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까? 평소 내가 가지고 있던 고전의 기준은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나의 삶과 고민에 맞닿아 있느냐로 따지는 일이 많은데, (독서 모임에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이 계셔서 반가웠다!) 오래전에 쓰인 책이 시간을 견디고 지금까지도 우리의 현실을 보여줘 반면교사할 수 있게 해 준다면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주어도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시간을 견디어 온 고전이 현시대의 책들과 비교할 때 항상 우위에 있느냐? 또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새로 나온 책들도 시대를 반영하며 함께 오래 살아남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 때, 고전이 될 것이므로. 고전도 고전이 아닌 시간이 있었을 것이므로.


더불어, 고전은 좋은 책이다 라는 결론에는 언제나 반대한다. 각자의 고민이 다른데, 어떻게 모두에게 좋은 책이란 게 있을 수 있겠는가? 기본적으로 '책'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책은 그저 나에게 좋은 책이 있을 뿐이다. 그러다 우연히 나와 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들을 딱 그 시기에 만나면 그냥 그게 그렇게 좋은 것이다. 운명적인 책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겠지만 운명적인 시간은 늘 존재한다.


아! 그래서 서머싯 몸의 책들을 고전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 묻는다면? 내가 읽은 책이 이 책 한 권뿐이니 일단 보류다. 그런데 답이 필요는 한가?  이번 독서 모임을 통해 나를 보니 나는 고전과 고전이 아닌 책의 경계를 좀 지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더라. 그러니 이 답은 내 안에선 당분간 나오지 않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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