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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우사랑 Apr 18. 2019

당연한 것은 없다

(with 눈이 부시게 7화)


공부 시간에 엎드려 자던 느희들은 잠결에 들었을수두 있겠지만은 등가교환의 법칙이라는 게 있어.  이 세상은 등가교환의 법칙에 의해서 돌아가. 등가교환의 법칙이 무슨 말이냐. 물건의 가치만큼 돈을 지불하구 물건을 사는 것처럼 우리가 뭔가 갖구 싶으면 그 가치만큼의 뭔가를 희생해야 된다, 그거야.


(···)


열심히 살든 ,니네처럼 살든, 태어나면 누구에게나 기본 옵션으로 주어지는 게 젊음이라 별거 아닌 거 같겠지만은 날 보면 알잖아. 느희들이 가진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당연한 것들이 얼마나 엄청난 건지. 이것만 기억해놔. 등가교환. 거저 주어지는 건 없어.


JTBC 드라마_<눈이 부시게 7화>中




시간을 돌리고 돌리고 또 돌려서 아버지의 목숨을 구한 혜자는 그 대가로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이십 대의 정신을 가지고 팔십 대의 몸이 되어버린 혜자가 마음껏 청춘을 낭비하는 젊은이들에게 하는 이 말이 젊은이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겠지만, 내 마음에는 와서 박혀 며칠 빠지질 않았다. 나이와 맞지 않는 몸의 상태, 그것은 극한의 약제로 나쁜 세포를 없애면서 내가 치러야 하는 대가와 같은 것이지 않았을까.  


항암 치료라는 것의 기본은 독한 약을 몸속으로 흘려보냄으로써 나쁜 세포들을 죽이겠다는 것이지만, 약물이 인공지능은 아니므로 나쁜 세포들과 함께 좋은 세포들이 다 죽게 되어 있다. 시간을 돌리지 않아도 나는 순식간에 할머니인 내 어머니의 '아이구, 삭신이야'와 같은 종류의 문장이 가진 신체 상태들을 한꺼번에 경험하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조금 나아지기는 했어도 내 나이 자체가 젊지 않고 완벽한 회복의 상태가 선으로 명확하게 그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현재 몸은 중년과 노년 사이의 어디쯤을 떠다니고 있으며 끊임없이 늙어가고도 있다.


이제야 나는 엄마의 지난 행동들을 이해한다, 고 생각 한다.


잘 걷다가도 무릎이 꺾여 다쳐 들어오던 엄마가 무릎에 힘이 얼마나 없었던 것인지, 글씨를 그림인 듯 흘려 쓰는 이유가 손목과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였다는 사실을, 뼈 마디마디가 쑤시면 잠자는 일도 형벌 같아 밤이 싫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전과 다르게 내 말에 빨리 반응하지 않을 때 그것이 정신적인 게 아니라 신체가 따라오지 않아 반쯤 포기되는 상태일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아도 늘 안다고 생각했다. 나이 들어 몸이 아프니 당연히 얼마쯤은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큰 병을 가지고 흘러온 시간, 내 몸으로 내가 아프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가 사람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 경험이 가져오는 격차에 매일 놀랐고, 과거의 시간 속 엄마에게 매일 미안했다. 이제 나는 나이 들었다는 것과  늙어가는 몸, 그리고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을 역전해버렸다는 사실이 가져오는 상념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한다.


혈관을 타고 온몸을 돌며 세포들을 공격하는 항암제를 맞으며 싸웠던 6개월과 그 이후 몸을 회복하려 견뎌냈던 6개월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이 있다면 타인에 대해 함부로 안다고 말하지 않기, 타인의 인생과 미래를 내 경험으로 예측하지 않기일 것이다. 또한 내가 경험한 사실조차 타인에게 그대로 대입해서 판단하지 말기.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 파란색도 모두 같은 파랑은 아니며, 같은 파란색이더라도 어떤 바탕 위에 칠했는지에 따라 다른 색깔이 되기 마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사정과 지나온 시간으로 형성된 배경이 있다. 그러므로 이해와 공감 앞에 최선을 다해 신중할 필요가 있다. 하여, 나는 이제 조금 더 조심스러운 사람이 되었다.


드라마 속 혜자의 말처럼 등가교환의 법칙은 무언가가 갖고 싶으면 그 가치만큼의 뭔가를 희생해야 된다, 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뒤집어서도 생각해 보자. 어떤 좋지 않은 일이 내 앞에 왔을 때, 그것은 분명 내게서 무엇인가를 빼앗아 가거나 나를 힘들게 하겠지만, 그럼으로써 내가 얻게 될 무엇이 분명 있다는 것. 그러므로 내게서 사라진 어떤 것을 아쉬워하기보다, 새롭게 알게 된 어떤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이라는 것을.


아프면서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보이지 않았지만 늘 있던 그 마음을 비로소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매일 나를 깨어나게 하는 빛과 잠들게 하는 어둠이 반복되는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지도 알게 되었고, 내가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일로 오늘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삐걱거리는 몸으로 보지 못하던 많은 것들에 눈뜨게 되었다. 내가 보지 못했을 뿐 나는 늘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오고 있었다.


세상엔 거저 주어지는 것도 없고, 당연한 것도 없다,는 말은 진실이다. 등가교환의 법칙 때문이 아니라도 누군가에게 받은 도움을, 마음을, 누구 아닌 다른 이에게라도 어떤 방법으로든 갚으려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게 세상 선순환의 구조에 편승해 살아가야 한다.


그나마 몸이 조금 나아졌다고 믿는 요즘, 나는 그런 생각들을 매일 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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