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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우사랑 Dec 24. 2021

가정법을 완성하는 방법

with. 백영옥 에세이_<안녕, 나의 빨강머리 앤>

우리는 많은 가정법 안에 산다. ‘이것만 끝내면’. ‘이번만 참으면’이란 말속에 종종 시간을 흘려보낸다. 하지만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것들, 가족과 친구, 건강은 나를 그저 기다려주지 않는다. 취업했고, 이사했고, 은퇴도 했으니 이제부터 불행 끝, 행복 시작일까. 늙은 부모는 내가 부자가 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고, 빠르게 크는 아이들은 함께 놀아줄 시간이 생길 때까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가장 소중한 것들은 순차적인 방식으로 얻기 힘들다. 그러니 결심했다면 내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시작해야 한다. 


백영옥 에세이_<안녕, 나의 빨강머리 앤> (p.29)




오래 엄마와의 여행을 꿈꾸며 살았다. 가족 간의 관계라는 것이 언제나 크고 작은 문제가 있는 것처럼 우리 가족도 그랬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 상황은 변하기 마련이고, 나는 분명히 기회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올 해가 지나면, 돈을 좀 더 벌면, 엄마 관절 아픈 걸 좀 치료하고 나면, 무수한 가정법들을 마음에 품고.


어느 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더는 지체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엄마의 무릎이며 건강이 많이 나빠져 있었지만, 그래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즈음, 덜컥 나에게 암이라는 큰 병이 찾아왔다. 그때부터 갑자기 급하게 짹각거리는 내 삶의 시간들로 모든 것들이 절박해지기 시작했다. 여행을 꿈꿀 수 없는 몸이 되어 다시 가정법을 썼다. 항암이 끝나면, 방사선이 끝나면, 기운을 차리면.


긴 투병의 막바지에 다다르자 삶의 시계는 다시 정 박자로 짹각이는 느낌이었다. 엄마의 긴 한숨소리도 안도의 숨으로 바뀌어 갔다. 그 많은 가정법들의 결말을 만들 꿈을 꿨다.


"엄마, 우리 제주도 한 번 다녀오자. 어버이날 선물로 엄마랑 같이 다녀오고 싶어"


이렇게 말했던 2019년 그 해, 어버이날엔 벚꽃이 어느 해보다 예쁘게 흩날렸다. 아마 내가 그때까지 살아서, 엄마와 여행을 말하고 있는 게 감격스러워 벚꽃들이 더 예뻤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음 날, 엄마가 쓰러졌다. 뇌졸중이었다. 1년을 요양병원에 의식을 가진 채, 말을 못 하고 누워있는 엄마를 보면서 완성되지 못한 가정법에 슬퍼하고, 또 다른 가정법에 시달렸다. 그날 내가 집에 있었더라면, 엄마를 모시고 미리 병원에 갔더라면, 엄마와 더 많이 얘기를 했더라면.


이제 엄마는 없고, 계획은 영원히 실현할 수 없는 꿈이 되었다. 가정법도 끝내 가정법으로 남아버렸다.


꿈에도 오지 않는 엄마를 가끔 원망한다. 꿈에서라면 어디도 아프지 않은 엄마와 손잡고 제주 바다를 달려 볼 수 있지 않을까, 가만히 앉아 지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행복하게 웃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꿈에서라도 그런 시간을 가져보고 싶어서일 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들은 순차적인 방식으로 얻기 힘들다."는 백영옥 작가의 문장을 이해하는 날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흘려보내고 난 뒤일지도 모른다. 가족과의 시간이나, 내 몸을 위한 운동을 하는 건 돈을 벌고 나중에 가져도 되는 게 아니라, 돈을 벌면서 지금 함께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건 내 옆의 좋은 사람들과의 시간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하는 이야기이다. 어떤 일을 하기에 좋은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 단순한 사실을 엄마를 보내면서 가슴 아프게 깨달았다. 하지만 엄마와 완성하지 못한 무수한 가정법들을 나를 지켜봐 주는 좋은 사람들과는 꼭 완성하고 싶다. 그게 남겨진 내 몫의 삶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오전에는 운동을 했고, 오후에는 친구네 가족과 밥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즐거운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고 집에 들어와 이 글을 쓰고 있다. 인생에 뭐 커다란 게 있는 것 같아도, 사실 인생은 이런 게 전부 일지도 모른다. 매일 하는 일들을 지켜가는 성실함으로 작은 성취들을 만드는 것. 좋은 사람과 함께 밥 먹고, 웃고 떠들고 놀다 집에 돌아와 흐뭇하고 괜찮은 기분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 사는 데 조금 문제가 있어도 순간순간 마음이 풀어지는 농담도 삶의 한편에 들여놓는 여유를 가지는 것. 


아마 이런 일들을 뒤로 미루지 않고 꾸준히 삶의 곳곳에 잘 끼워 넣는 일이 지금도 마음속에 품고 있는 그 많은 가정법들을 완성하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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