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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우사랑 Dec 22. 2021

고통을 읽는 이유

with. 정지우_<너는 나의 시절이다>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사람 앞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나의 고통이 나만의 것, 내 삶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고통이 발을 딛고 선 대지처럼 단단하게 우리 삶을 받쳐준다는 걸 알게 될수록, 더 진심으로 웃을 수 있게 되는 듯하다. 그러니 행복을 이야기할 때는, 고통에 관해 생각하도록 하자. 삶을 긍정할 때는, 그 어려움을 인정하도록 하자.


정지우_<너는 나의 시절이다> (p.32)




몇 년, 제 삶은 고통이 전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치매를 앓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저는 덜컥 암을 앓고,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하다 돌아가시고. 물론 제가 뭐 특별한 사람도 아닌데, 저한테도 그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만 연달아 일어나는 건 힘에 부쳤습니다. 한꺼번에 일어나지 않았음을 감사해야 할까요. 그 모든 일들이 몰아치며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날들. 그 견딜 수 없을 것만 같던 하루하루를 지나고 나니 6년이 흘렀습니다. 고통의 총량이라는 게 있다면 지나온 6년으로 내 안의 모든 고통이 다했기를 바라는 얄팍한 마음입니다. 그런 약한 마음을 안고 매일 책을 읽고 있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책보다는 남들은 좀 무겁다는 드라마를 즐겨보는 정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삶의 끝에 왔다는 절박한 고통에 직면해서야 저의 읽기는 시작됐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좀 가벼운 걸 읽으라고. 즐거운 걸 읽으라고. 그런데 저는 그렇게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책들에서 위로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었습니다. 본능처럼 고통을 이야기하는 책들에 끌렸습니다. 그 고통이 실재하는 것이든(에세이), 만들어진 것이든(소설) 그들의 고통을 온몸으로 통과하고 나면 내 고통을 끌어안을 용기가 생겨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게 나만 혼자 견디고 있는 건 아닐 거라는 어떤 안도감이었다는 건 여러 권의 책을 읽고 난 후에 알았습니다.


 <황정은의 야심한 >에서 황정은 가님은 이런 말을 합니다. 독자에게 어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아픈 이야기를 읽는  점점 어려워진다고.  독자에게 작가님은 본인도 어렵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다만, 읽기 자체가 좋아서 읽고 있는 내용이 자신을 상처 입힐  그냥 상처를 받고 만다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말해요. 책을 읽을  어떤 방식으로든 본인에게 상처를 남기는 책을 좋아하는  같다고. 고통스러운 내용이 담긴 책들을 읽으면 물론 고통스럽지만, 세상에 고통만을 기록하려는 책은 없다고. 그러면서 이런 말로 끝을 맺습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고통을 겪을 , 내버려 두면 그게 그냥 고통일 뿐인데 누군가 의지를 가지고 현실을 들여다보고, 재해석하고, 현실하고 상호작용을 하면서 글로 썼을 , 그럴   책을 통해  고통의 발생을 들여다볼  있고, 의미도 생각할  있고,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도 하면서 다음을 생각해  수도 있는 거라고.


오늘 아침에 황정은 작가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  알았습니다. 나도 작가처럼 책이나 드라마의 내용이 나를 상처 입힐 , 그저 상처를 입는 사람이라는 , 그런데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  안에서 희망을 찾는 사람이라는 . 물론 황정은 작가님은 이어서 이런 말도 했습니다.  책에서 고통만을 읽는 사람도 있고  사람에게  책은 읽어내기 어려운 책이라고. 그런 책을 억지로 읽을 필요는  없다고. 그러니 그럴 때는  그럴  읽을만한 가벼운 책을 읽으면 좋겠다고.


저는 제가 고통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어서 좋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겪은 일만 가까스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 고통으로 딛고 선 땅 위에서 내가 겪은 고통으로 타인의 고통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면, 힘겨운 6년으로 얻은 최고의 선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 때, 저는 제가 통과한 고통과 슬픔을 써야 할 것 같은데, 그래야 다음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이야기는 언제 끝날지 모르겠어서,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아주 작은 고통에 불과할 것 같아서, 그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지겨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 쓰기를 그만두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지우 작가도, 황정은 작가도, 또 다른 많은 작가들도 고통과 상처 슬픔을 통해 다음으로 건너갈 용기를, 어쩌면 희망을 이야기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말합니다. 다시 써보자, 결심하고 나니 이런 문장들이 제 등을 밀어주는 것 같습니다. 너도 고통의 이야기들 속에서 위로받지 않았느냐고, 니 고통을 쓰는 일이 단 한 사람에게라도 안도감을 줄 수 있다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해줄 수 있다면 쓸 이유는 충분하다고, 어서 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알고 있습니다. 사는 동안 고통은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는 또 다른 고통이 들어올 거라는 걸. 그러니 고통을 끌어안고도 희망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그 모든 길이 책과 이야기 속에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오늘도 고통을 이야기하는 그 많은 책들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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