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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우사랑 Dec 21. 2021

그저 쓴다

with. 에릭 메이절_<글쓰기의 태도>


그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생각, 자신이 말하려고 하는 건 누군가 이미 말했다거나 자신은 이런 의견을 낼 만큼 깊이 있는 통찰력을 갖지 못했다는 걱정 없이 일단 자유롭게 써 내려갔다. 한 가지 문제, 즉 실수를 하거나 망칠지 모른다는 이 평생의 두려움에 초점을 맞추자 그의 글쓰기 생활이 아주 많이 달라졌다.


에릭 메이젤_<글쓰기의 태도>




요즘은 거의 매일 무엇인가를 쓴다. 타인의 문장이든(필사), 나의 문장이든(일기), 타인의 문장에서 나오는 나의 문장이든(브런치) 힘들이지 않고 쓴다. 문장의 기승전결을 생각하지 않고 자유롭게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쓰고 있다. 


글을 써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힘을 빼고 쓴다는 생각만 해도 힘이 들어간다. 불행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에서. 내가 상상하는 나는 힘을 빼고 자유롭게 쓰고 있는데, 정작 현실의 나는 그렇지 못해서, 결과물은 잔뜩 힘이 들어가 삐걱거리고 어색한 문장이 되고 결국 노트북의 어딘가에 그대로 처박힌다. 처박힌 것이 문장이 아니라 나의 일부분 같다. 그러다, 얼마 전에 이 문장을 읽었다. 


내가 무지하다는 생각, 내가 말하려고 하는 건 누군가 이미 말했거나 나는 이런 의견을 낼 만큼 깊이 있는 통찰력을 갖지 못했다는 걱정, 책 속의 문장이 정확하게 내가 매일 하는 걱정이고 글쓰기를 즉시 멈추게 하는 버튼과 같은 것이었다. 이 문장을 읽은 순간 힘을 빼고, 걱정을 없애고 일단 자유롭게 쓸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이상한 일이다. 모르고 있던 걸 알게 된 게 아니다. 다른 곳에서도 무수히 읽었던 내용들이다. 아마 이제 다시 쓰고 싶다는 내 안의 열망이 익숙한 문장을 다시 끌어당겼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쓰고 있는 노트북에는 임시저장 폴더가 있다. 썼으나 어쩌면 빛을 보지 못하고 결국 휴지통에 버려질 문장들이 있는 곳. 아주 가끔 다시 불려 나와 새로 다듬어지기도 하는 문장들이 사는 곳. 그들의 운명을 나조차도 모르는, 제목 그대로 임시저장 폴더다. 운명의 갈림길에 있는 문장들을 다시 읽어봤다. '기울어진 마음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이 마음은 빨라질 것이다.'와 같은 멋 부린 문장들이 여전히 간지럽다. 나의 무지와 불안이 묻어나는 문장들을 하나하나 읽다가, 그런데 이제 괜찮다는 마음이 들었다. 유치하고 허세 가득한 문장으로 표현해야, 숨기지 못하고 불안함을 드러내며 써야 내 마음에 가깝다면 그렇게 쓰면 된다. 


실수를 하거나 망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이겨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살아가는 동안 평생 나를 따라다닐 것이다. 나는 여전히 쓰다가 틈만 나면 주춤거린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쓰는 게 답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쓰기 시작하면서 알게 됐다. 나는 쓰는 행위 자체를 그저 사랑하는 사람이다. 바로 이런 생각이 요즘 내가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괴테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무가 타는 것은 그 안에 탈 수 있는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며, 어떤 사람이 이름을 얻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이미 그럴 만한 요소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내 안에 뭐가 있는지는 아직 나도 모른다. 써봐야 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쓴 문장들이 '나'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쓴 것들이 내 삶을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보여주고 증명해줄 거라는 건 알 것도 같다. 


그러므로 쓴다.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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