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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우사랑 Dec 26. 2021

너는 그렇게 살고, 그렇게 꽃피우고, 그렇게 시들거라

with. 안희연 산문집_<단어의 집>


튤립의 비밀을 말해줄게. 튤립을 사다 꽃병에 꽂으면 꽃송이가 테이블에 닿을 지경으로 축 늘어져버린다? 사람 손이 닿으면 그래(임상 실험으로 몇 번 확인). 최대한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면 물을 머금고 어느새 꼿꼿하게 선다. 그때 예쁘다고 줄기에 손을 대면? 그대로 콱 죽어버리겠다고 결심한 듯 금방 푹 고꾸라져. 겨울 냉기로 스스로를 지키고, 꺾인 후에도 아무 도움도 필요 없다는 듯이 구는 튤립을 보면서 혼자 오래 감상에 젖었더랬지. 그래. 너는 그렇게 살고, 그렇게 꽃피우고, 그렇게 시들거라, 응원하게 되더라. 같은 마음으로 네게도 또 한번 응원을 보낼게.             -<월간 여름> 2021년 3월 호에서


안희연 산문집_<단어의 집> (p.51)






날씨가 너무 추워서 그랬을까? 아침부터 편두통의 조짐이 있더니 오전 내내 두통이 미세하게 나를 괴롭히는 날이었다. 약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며 예민해지는 이런 날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추워진다. 평소 같으면 아무 일도 아닐 작은 일에 예민해지는 것도 두통과 함께 견뎌야 한다. 그렇게 글을 쓰고 싶어서 나와 앉아 있는 카페에서  할 수 있는 게 잠깐씩 책 읽는 거 말고 없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약하다. 요즘 매일 글쓰기를 다짐하며,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던 마음이 온데간데없다. 


그러다 이 문장을 만났다. 안희연 시인이 독일에 사는 친구와 주고받은 손편지의 일부다. 그러니까 이 문장은 안희연 시인의 문장이 아니라 시인의 친구 한여름(이름도 시적이다)의 문장이다. "누가 시인 친구 아니랄까 봐(?) 어쩜 그리 글을 맛깔나게 쓰는지, 번번이 내가 아니라 이 친구가 시인이 됐어야 했다며 통탄, 아닌 감탄"(p.46)을 하는 시인의 마음만큼은 아니어도, 내 편두통을 일시적으로 잊을 만큼 나도 감탄했다.  


선물 받은 작은 달력이 버려지는 게 아까워 그 뒷면에 한 달의 이야기를 편지로 써 보내는 친구의 감성도, 친구가 보낸 한 달이라는 시간을 <월간 여름>이라 이름 붙여 소중하게 아끼는 시인의 마음도 모두 포근하고 따뜻하다. "그래. 너는 그렇게 살고, 그렇게 꽃피우고, 그렇게 시들거라, 응원하게 되더라. 같은 마음으로 네게도 또 한번 응원을 보낼게."라는 마지막 문장은 특히 그랬다. 나는 나의 일을 하고,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하고, 그렇게 살다가 만약 우리가 서로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하는, 게슈탈트 기도문이 떠오르기도 하고, 무심한 듯 그러나 일정 거리에서 계속 나를 지켜봐 주다 한 번씩 고개를 돌리면, 내가 여기 있어라고 말하 듯 씩 웃어주는 내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게 이 세상 좋은 시선들을 떠올리게 해주는 글이다.


여전히 미세한 두통이 있고, 여전히 약을 먹을까 말까를 생각하지만, 통증이 가져온 예민함에는 마음이 풀어졌다. 꽁꽁 얼었던 마음이 글 하나로 따스한 햇살 아래 눈처럼 스르르 녹아간다. 좋은 문장 하나가, 따뜻한 글 한 편이 가진 힘일 것이다. 그렇게 한껏 풀어진 마음으로, 지금 이 순간 내 곁의 좋은 사람들에게 나도 같은 응원을 보내고 싶다. 

"그래. 너는 그렇게 살고, 그렇게 꽃피우고, 그렇게 시들거라." 너의 어딘가, 고개 돌려 볼 수 있는 곳에는 언제나 내가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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