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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우사랑 Jan 19. 2022

또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하루

with. 최승자_<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내가 체험한 바로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지나간 삶을 아주 짧은 한순간에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극히 선명한 영상으로 보게 되고, 그러고도 살아야 할 앞날에 대한 어떤 본능적인 계획을 한순간의 청사진으로 보게 되는 것 같다. 물론 그 청사진은 오랜 혹은 짧은 시간 뒤에 또다시 변경될 수 있는 것이긴 하겠지만, 말하자면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살아 있는 한 인간의 시각을 충격적으로 교정시켜줄 수도 있는 것이다.



최승자_<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中 '죽음에 대하여'> (p.47)




지워지지 않는 엄마의 모습이 많다. 내가 집을 나설 때마다 복도에 나와 손을 흔들어주던 모습, 다녀오면 늘 잘 다녀왔나, 밥 먹었나 챙기던 다정한 목소리, 요양병원에 누워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한 팔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따뜻한 손길 같은 것들. 평생의 그리움으로 품고 살아야 할 것들. 꿈에라도 다시 느껴보고 싶은 것들.


꿈에 엄마가 다녀가면 

마냥 좋을 줄 알았다. 내내 품고만 있는 그리움들이 만져질 것만 같아서. 하지만 꿈이 너무 생생하면 깨어나 엄마 없는 현실이 슬퍼서 울고, 꿈속에서도 꿈인 줄 알면 또 그 사실이 안타까워서 꿈속에서부터 울다가 실제로 울면서 깨어난다. 이래도 저래도 결국에는 울고 만다. 그렇게 눈물로 시작된 새벽과 아침에는 어쩔 수 없이 또 죽음을 생각한다. 다른 세상이란 게 정말 있나, 하는 답 없는 의심에 깊게 몰두한다. 그러다 죽음과 관련된 책을 찾아 읽는다. 이 세상을 건너가 존재하는 다른 세상이 있다면 그 세상과 이 세상을 연결해주는 건 꿈일 거라는 상상을 하면서. 상상보다는 바라는 마음이겠지만, 어쨌든 어떤 연결점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오늘도 그랬다. 또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하루.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나에게 죽음이란 

모든 일의 해결점처럼 보였다. 끝이 오지 않을 것 같은 아버지와의 불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내 존재에 대한 힘겨움, 휘두른다는 자각도 없이 나를 쥐고 흔드는 형제, 불쌍한 엄마를 두고는 탈출도 할 수 없었던 가족이라는 감옥. 그때 죽음은 그 모든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문이었다. 잘 알지는 못해도 환하게 빛나는 환상의 문 같은 것. 그 시절 그 모든 것들을 끝낼 수 있는 죽음이라는 문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까스로 삶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됐다. 언제든 나는 그 문을 통과하기만 하면 됐으니까. 그리고 최승자 시인의 이 글 '죽음에 대하여'를 읽으면서 어렴풋하던 그때의 내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됐다. 그것은 집요한 불면의 끝에 어느새 가볍고 감미롭게 찾아드는 달콤한 잠처럼, 혹은 보다 적극적으로는 고통의 절정에서 느끼는 쾌락처럼, (p.52) 유혹적이고 다가가고 싶은 것이었다. 그런 강렬한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단 한 가지 이유, 그건 아마 엄마였을 것이다.





엄마는 늘 자신이 쓰러져 누워있다 죽게 될까 봐, 나에게 짐이 될까 봐 걱정하셨다. 그렇게 죽고 싶지는 않다고, 그런 일이 생기면 나를 보내 달라는 말을 늘 하셨다. 나도 막연하게 엄마를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뇌경색으로 쓰러진 엄마가 병원 응급실과 병동을 거쳐, 요양병원에서 일 년 여를 누워 한쪽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말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정신만 깨어 있는 걸 오래 지켜보면서 나의 죽음에 대한 관념도 완전히 달라졌다. 죽음이란 게 내가 원하는 대로 죽을 수 있는 선택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 가족이라 해도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 그래서 결국 원치 않는 삶을 오래 이어가며 서로의 고통을 바라보며 한계점을 넘어 지쳐 가게 되는 것. 그러면서도 나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도 결국엔 죽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라고. 


하지만


엄마가 돌아가시자 죽음은 

유혹을 벗고 공포의 외피를 입었다. 죽음은 모든 일의 해결점이 아니었다. 그저 모든 것들이 그 순간에 멈추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모든 일은 이어진다.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죽음으로 향하는 길의 그 고단함이 내 죽음의 관념을 바꿨다. 다시 최승자 시인의 표현을 빌려보면 이렇다. '죽음 앞에서 비로소 죽음의 환상을 깨뜨릴 수 있는, 깨뜨리고 난 뒤의 여유. 죽음 앞에서 비로소 숨을 가다듬고 살아야 할 명분과 살아야 할 힘을 얻어내는 이 부조리한, 뻔뻔스러운, 비인간적인, 그러나 지극히 인간적인 여유.' (p.50) 이 문장 안에는 엄마를 보내며 내 안에 가졌던 모든 감정이 다 들어 있다. 내 안에 있으나 표현할 수는 없었던 감정들. 내 감정이 언어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을 때 가지는 위로, 그 위로를 이 문장에서 받았다.


엄마가 죽음으로 죽음으로 가까이 가던 그 오랜 길, 그 길고 지난한 시간들을 보는 일은 많은 사람들이 겪는 일이기도 하지만 또 누구나 다 맞닥뜨리는 일은 아니다. 그런 시간이 내게 온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내내 했다. 그것이 내가 요양병원을 매일 갔던 이유이기도 하다. 말을 잃은 엄마가 눈빛으로 해주던 많은 말들을 내가 제대로 들었는지 나는 아직 모른다. 다만, 가끔씩 힘겹게 내 머리를 쓰다듬던 엄마의 손길이 살아가라는 말이라는 걸, 다 잊고 잘 살아가라는 말이라는 걸 이제는 알 것 같다. 엄마도 알고 있었을 테니까. 내가 자꾸 죽음을 동경했던 걸.


엄마가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마지막 말은 아마도 살아가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일 년을 넘어 이 년 가까이 되어가는 지금에도 내 삶의 곳곳에 엄마는 존재한다. 오늘처럼 자다 깨서 눈물바람을 하는 날에도 나는 엄마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그 손길을 생각하고, 그 손길에 담긴 내 삶의 당위성을 찾는다. 그러니까 나는 살아야 한다고. 그것도 아주 잘 살아야 한다고.


오늘 펑펑 내리는 눈과 함께, <죽음에 대하여>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니 <죽음에 대하여> 속의 한 문장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이제 나는 무차별적 불행의 이상화 대신에 선택적 행복의 실천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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