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 당신의 이름은 조금 흔한 편이라 자주 마주치곤 해요. 나에게 ‘혜경’이란 이름으로 처음 만난 사람은 당신이기에, 그 이름의 처음이자 마지막은 온통 당신으로 점철되어 있죠. 잘 지내요? 알다시피 나는 치열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은 많이 아파서 울었고, 지금은 나름 건강하게 지내고 있어요. 불행에 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랍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어린 나를 먹이고 키우고 재운 여자 어른에 대해 말하자면 당신을 빼놓을 수 없어요. 할머니, 엄마, 큰 이모 그리고 당신.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지만, 아마 당신은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내 곁에 머물렀겠죠. 미안하지만 이제 막 태어난 아기였던 내가 그때의 당신을 기억하기란 힘들어요.
대신 내가 간직하는 당신과의 추억은 5살부터 시작돼요.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를 지나서 안쪽까지 들어와야 하는 시골. 바로 옆에는 산이 있고 빨간 우체통이 놓여 있던 집. 나는 당신이 오는 날을 기다렸어요. 좁은 길 너머로 흰색 트럭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나와 언니는 미리 나와서 기다리곤 했어요. 트럭 문을 열고 나오는 당신을 향해 달려가서 안기고 당신 특유의 냄새를 맡으면서 포근함을 만끽했죠. 작은 내 몸보다 훨씬 컸던 당신의 몸. 나는 그 품이 그리워요. 긴 세월이 흐른 나머지, 나와 당신의 키가 엇비슷해져서 당신 품이 더 이상 크게 느껴지지 않기에 조금 슬프거든요.
내가 당신을 만나러 간 적도 많았어요. 나는 시내에 위치한 큰 이모네 아파트가 좋았어요. 집 냄새가 익숙한 만큼 편안했고, 언제나 당신과 큰 이모가 활짝 웃으며 반겨주었기 때문이죠. 같이 먹은 불고기 피자 맛과 당신이 녹화해 놓은 비디오 속 장면이 생생해요. 가끔씩 하늘을 물들이는 불꽃놀이를 감상하며 방방 뛰었던 일도요.
당신은 구불구불한 파마머리를 처음 해준 사람이기도 해요. 만화를 보며 과자를 먹던 내 머리카락에 롯드를 둘둘 말아주었던 당신. 나는 무얼 하는지도 몰라서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죠. 롯드를 다 풀고 머리에 남은 약품을 전부 씻기고 화장실에서 나왔어요. 젖은 머리카락을 손수 말려주고 머리핀을 꽂더니 너무 예쁘다면서 나를 번쩍 안았던 당신. 거울에 비친 모습이 어색했지만 당신이 예쁘다니 나도 그게 마냥 좋았어요. 그리고 파마머리가 다 풀릴 때까지 그 머리를 유지했지요.
어른의 사소한 행동은 어린아이에게 크나 큰 기쁨이자 선물이 되어요. 당신은 나에게 많은 걸 준 사람 중 한 명이예요. 큰 빗으로 머리를 빗어준다거나 조카들을 위해 만화를 일일이 녹화한다거나 밥상을 차려서 떠먹여 준다거나 등. 그 사소한 일들은 내 안에 쌓여서 앞으로 성장할 아이에게 소박한 행복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죠. 나는 그런 당신이 참 좋았고 많이 사랑했어요.
더위로 아우성치던 여름날이었어요. 방학이라 늦잠을 자던 나에게 갑자기 언니가 뛰어왔죠. 내 몸을 마구 흔들더니 놀란 목소리로 나를 깨웠어요. 그리고는 벌벌 떨며 당신이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전했어요. 사람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맞닥뜨리면 멍해진다는 걸 체감한 순간이었어요. 끈질긴 질병이 나와 당신에게 영원한 이별을 던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죠. 그날 이후부터 당신은 질병과의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어요.
나는 거의 매일 당신이 입원한 병원을 왔다 갔다 했어요.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학교가 끝난 뒤, 밤이 늦은 시간이라도 당신을 보러 달려갔죠. 당신이 좋아하는 명랑함을 보여주려 애썼고 손을 꼭 붙잡았고 우리가 만든 추억을 수도 없이 나열했죠.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며 당신이 그 추억으로 인해 아주 조금씩 나아지길 바라는 염원을 가졌어요. 비록 당신은 힘 없이 웃었지만 나는 그 모습이 그저 다행이었죠. 웃기라도 한 게 어디예요.
추석에 아주 잠깐 당신이 우리 집에 머문 적이 있었어요. 우리 집에는 내가 엄마를 위해 사둔 만화책이 잔뜩 있었고 나는 당신에게 읽어보라며 한 무더기를 품에 안고 왔죠. 우리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고요함 속에 몸을 맡겼어요. 당신은 어릴 때 읽었던 만화책을 읽었고 나는 수업 때문에 봐야 할 소설책을 읽었어요. 재미없지만 억지로 읽어야 해서 표정을 구기면서도, 내 눈은 흥미롭게 만화책을 읽는 당신을 보고 있었죠. 그 모습을 보자 잠시라도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아 안심이 되었어요. 물론 아주 잠시지만요.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을 붙잡거나 놓거나를 반복하는 나날의 연속이었어요. 당신은 내가 알던 모습이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낯설어졌어요. 어른 같다가도 아이 같기도 했고, 나를 알기도 했다가 모르기도 했죠. 점점 무서워졌어요. 당신은 나에게서, 가족에게서 서서히 멀어지고 있다는 걸 체감했거든요. 이제 시간이 정말 남지 않았구나. 나는 억지로 시간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건 당연히 불가능했어요.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은 나를 보며 옷 한 벌을 사줘야 한다고 말했어요. 나는 마음이 무너져 내렸어요. 당신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여전히 숫자가 한자리로 떨어지는 나이의 아이였나 봐요. 그 음성을 또렷하게 기억해요. 왜냐하면 그 말이 이승에서 내게 한 마지막 말이 되었으니까요. 예쁜 옷을 사주겠다던 당신은 11월 말 그 해의 마무리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죠.
다가오는 새해에도 당신이 곁에 있기를 바랐건만, 내 기도는 닿지를 않더라고요. 내가 신을 믿지 않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당신과 나의 인연이 딱 거기까지로 정해진 건지는 몰라도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어요. 4개월 동안 병마와 싸운 뒤 편안히 눈을 감은 당신이 작은 도자기병 안에 들어간 것을 보자 허탈함과 슬픔이 밀려왔고 미친 듯이 울었어요.
나는 큰 이모, 엄마, 그리고 다른 가족들과 껴안으며 당신에게 작별 인사를 했어요. 우리는 당신이 없는 이승을 반드시 살아가야만 했죠. 그래서 애도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남은 사람들끼리 품을 나눴어요. 그래야만 앞으로 우리가 당신을 추억할 수 있으니까요.
기억은 이별을 경험할 때 가장 부피가 커져요. 사라진 존재가 보고 싶은데, 실체가 없다면 기억의 힘을 빌려야 하기 때문이죠. 이승에서 당신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기억의 힘을 빌려서 지내고 있어요. 다행히 당신과 오랜 시간을 붙어 지낸 덕분에 기억의 분량이 넉넉했고 우리는 슬픔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졌어요.
2년 뒤, 나는 이모가 되었어요. 나에게 이모라는 존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뻐해 주고 눈높이를 맞춰주는 친절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에요. 어린 조카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해졌어요. 과연 내가 당신만큼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거든요. 나에게는 그럴 자격도, 그만큼의 사랑도 없었으니까요. 그때 다시 깨달았죠. 당신은 배 아파 낳은 자식처럼 나를 키웠다는 사실을요. 내가 과연 당신 같은 이모가 될 수 있을까요? 여전히 의문 투성이에요.
얼떨결에 이모가 되고 난 뒤, 나는 당신과 함께 했던 기억을 하나씩 떠올렸어요. 내가 울 때 당신은 어떻게 달랬더라. 내가 좋아하는 걸 당신은 어떻게 알았더라. 내가 속상해하면 당신이 나에게 어떤 말을 건넸더라. 내가 기뻐하면 당신은 어떤 표정으로 응답했더라. 마치 교과서를 펼쳐 놓고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상태가 되었어요.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고 기억하면서 이모가 되는 중이에요. 책장에서 책을 꺼내는 것처럼 당신이 꽂아놓은 기억을 하나씩 빼서 살펴보고 있어요. 기억의 힘을 여기서도 빌려 쓰는 중이에요. 당신에게 많이 고마워요. 당신만큼은 아니지만, 노력하는 이모는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번 더 같은 질문을 할게요. 잘 지내요? 나는 당신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당신도 나와의 추억을, 우리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기를 바라요. 그렇게만 지내주면 다행이에요. 더 바랄 건 없어요.
편지를 쓰다 보니 벌써 당신이 떠난 지 7년이나 흘렀다는 걸 알게 되었네요. 함께 보낸 시간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죠. 그럼에도 마냥 공허함만 느끼지는 않을 거예요. 우리에게는 추억이 너무나도 많으니, 나는 안간힘을 쓰며 당신을 기억할 거예요. 이별한 순간부터 몸을 불리는 당신과의 기억. 오늘은 당신 꿈을 꿨으면 좋겠어요. 또 편지할게요, 소중한 나의 막내이모 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