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사랑

by 이낭만



지금부터는 오직 당신들만을 떠올리며 한 글자씩 적어보려고 해요. 우리가 작은 점으로 선을 긋고 종국에는 여러 장의 그림을 수도 없이 그렸던, 소란스러운 시절을 조심스럽게 꺼내면서요.


우리 모두가 처음 만난 시기는 제 각기 다르지만 뭉쳐진 시기는 일치해요. 그때 나는 여성 문학을 공부하고 싶어 했어요. 때마침 교내에서는 재학생이 학회를 만들어서 일정 기간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열었어요. 나는 기획안도 만들기 전에 과 사무실 문을 열었고, 큰 소리로 외쳤죠. “여성 문학 공부할 건데 참여하고 싶은 사람!” 그때 번쩍 손을 든 당신들 덕에 나는 ‘이 시대의 사랑’을 만날 수 있었어요.


우리는 함께 기획안을 만들었어요. 다루고 싶은 소설을 모았고 한 명씩 마음에 품고 있던 작가들의 이름을 나열했어요. 나혜석, 오정희, 김선우 등 다루고 싶은 작가들의 작품을 정성스럽게 골랐고 이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눈앞의 현실과 엮고 싶어 했어요. 그렇게 만든 기획안이 통과했고 우리는 강의가 전부 끝난 저녁, 빈 강의실에 모여서 시간을 쪼개가며 각자의 생각을 펼치기 시작했어요. 자기 검열도 날카로운 지적도 없이 자유롭게 연상할 수 있는 시간. 그 시간만큼은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우리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점 하나라도 찍었죠.


이때부터 각자 성장 배경은 달랐어도 차별과 혐오에 맞선다는 마음 하나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대를 시작했어요. 납득하기 어려운 사건이 일파만파로 퍼진 세상에서 우리가 조금이나마 할 수 있는 저항을 하기로 마음먹었죠. 혼자서는 버겁지만 여럿이서 하면 가능한 행동. 듬직한 내 편이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고 덕분에 작은 용기가 피어올랐어요.


나는 우리가 목소리를 내고 문제에 집요하게 파고들고 질문하고 사유했던 시간들을 결코 잊을 수 없어요. 같은 공간에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며 중요하게 여기는 바를 펼치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어나온 현장에서 구호를 외치면서 내 가슴은 벅찼고 점점 충만해졌어요.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비슷한 생각을 공유한다는 건 한 사람의 시선을 넓혀주는 지점이 된다는 걸 몸소 깨달았던 거죠.


이십 대 초반부터 스타트를 끊은 우리만의 ‘연대’는 내 삶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어요. 나에게 연대의 느낌이란, 너무나도 강렬하고 따사로워서 이걸 꼭 쥐고 있어야만 버틸 수 있게 되었죠. 든든한 내 편이란 가족 외에도 생길 수 있다는 걸 당신들이 알려줬거든요. 나는 당신들의 행동 덕에 많은 것을 배웠어요. 스스로를 지키고 다른 이에게 손 내미는 법, 부당함에 침묵하지 않는 법, 자신의 가치의 중요성을 자각하는 법 등 두툼한 분량의 책들이 내 안에 쌓였고 나를 키웠죠.


‘싸울수록 친해진다’는 말은 우리에게 성립되는 문장이 아니에요. 할퀴고 욕을 퍼붓고 미간을 찌푸리는 싸움 없이도 친밀함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많으니까요. 우리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배려와 대화 그리고 낭만이었어요.


눈에 보이면 무작정 달려가서 안기고, 겹치는 취향에 대해 밤새도록 말하고, 우울한 사람을 위해 무릎을 빌려주고 눈물을 대신 닦아주었던 일. 또는 시험 기간에 밤을 새우면 늦게까지 열람실에서 함께 하거나 집이 멀었던 나를 위해 이불을 내어주던 일까지. 거창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당신들에게는 기본적인 태도, 반대로 무감각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섬세했던 그 사소한 배려는 누적되었고 내 안에서 서서히 뭉쳐지고 있었죠. 그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에요.


또 한 가지. 우리는 좋아하는 노래가 상당히 많이 겹쳐서 이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말한 적이 많아요. “이 노래 알아?”라고 말하자마자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틀어막았죠. 그건 이미 사랑하는 노래가 연인의 마음에 들어왔을 때 보이는 반가움의 제스처였어요. 우리는 이상은의 <비밀의 화원>과 새소년의 <난춘>을 들으며 감성에 젖었고, 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를 통해 우리 존재 자체를 긍정하며 따라 불렀죠. 그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반, 또는 나와 어울린다며 성심성의껏 고른 음반을 선물해주기도 했어요. 언제나 우리 옆에는 음악이 있었지요. 나는 여전히 그 노래들을 들으면 당신들이 떠올라요.


기억나요? 별 하나 안 보이던 새카만 밤하늘을 보면서 별말하지 않았는데도 좋다고 웃었던 날이요. 시험과 졸업논문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우리는 시원한 밤공기를 만끽하고 싶어서 옥상으로 달려갔어요. 사진작가와 모델이 유동적으로 변하는 상황을 만들어서 백장이 넘는 추억을 남긴 날. 그 어떤 캄캄한 어둠이 끌어당겨도 우리 나름대로 자그마한 탈출구를 만든 셈이죠. 그날, 옥상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었고 우리는 찰나의 자유를 느꼈어요. 영원하길 바랐던 청춘의 바람이 우리를 주위를 맴돌았고 가슴 한 구석에 꼭 붙어 있어요. 나는 이 느낌을 계속 간직하고 싶어요.


가끔 이십 대 초반을 함께 보냈던 당신들의 모습을 떠올려요. 낡고 축축한 냄새가 나는 과 사무실에는 언제나 당신들이 있었고, 각자의 노트북 앞에서 과제를 하다가 한 명이 입을 열면 백 마디의 감탄사를 붙였죠. 책과 영화와 음악을 사랑해서, 우리의 술자리에는 그것들에 대한 추천과 감상이 끊이질 않았던 것도요.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당신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끊임없이 건넸던 당신들. 이제 내 삶과 사랑 이야기를 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어요.


봄이 왔어요. 알다시피 나는 봄을 싫어해요. 분홍빛 벚꽃이 온 길거리를 물들면서 다들 들떠하는 그 계절이 나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아요. 왠지 모르게 축 처지고 졸리고 울적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언제나 이 봄이 얼른 지나가버리길 바라요. 그럼에도 우리가 캠퍼스에서 만난 벚꽃까지 미워할 수는 없었어요. 나는 꽃 잎 안에서 떠들고 춤추는 당신들을 보며 걱정 없이 웃었으니까요. 그래서 딱 그 장면에 나온 벚꽃만 좋아하려고 해요. 당신들은 어떤가요?


모두가 사회로 나가면서 예전만큼 붙어서 지내는 날들이 현저히 줄어들었어요. 그래서 나는 이따금씩 연대의 불가능성에 대해 생각해요. 이러다가 멀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함을 동반한 채로요. 각자 생각하는 바를 존중하지만 각박한 세상을 마주하면 엇나갈 위험이 크기에, 나는 이 연대가 깨지는 건 아닐까 봐 때로는 한숨이 나와요. 이런 말을 하면 당신들은 지나친 걱정이라며 이럴 때는 당장 만나야 한다고 말하겠지요? 상상하니까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네요.


혼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볼 때면 내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당신들이 보고 싶다고 혼잣말을 하기도 해요. 초라한 나를 빛나는 사람이라고 여겨준 사람들. 역시나 오늘도 보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네요. 있잖아요, 우리의 청춘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청춘은 무수히 좌절해도 괜찮은 시기라고 들었어요. 나는, 그리고 우리는 계속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있기에 이 청춘이 아주 오래갈 것이라 믿어요. 그 힘 안에는 목청이 큰 외침이 있고, 말캉한 심장이 있고, 끈질긴 사랑이 있으니까요.


다시 아침이 왔어요. 졸린 눈을 비비고 억지로 세수를 하며 밖으로 나설 당신들이 떠오릅니다. 오늘은 또 어떤 하루가 닥칠지 예상할 수 없지만 무탈하기만을 바라고 있어요. 당신들이 보낸 짧은 텍스트만 봐도 절로 기쁜 마음이 드는 건 우리가 그려나간 사랑의 부피가 더욱 팽창하고 있다는 증거겠죠. 소량의 사랑을 잃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이미 올해의 초반이 지나갔지만,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 시대의 사랑. 내 시대의 사랑. 우리 시대의 사랑.

아련한 추억까지 동봉해서 발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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