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으로 전진과 중단 사이에 서 있었을 때였던가요. 나는 부모님 댁에서 약을 먹고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다시 약을 먹고 영화 한 편을 본 다음, 졸리면 또다시 잠에 빠져드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어요.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내면은 시끄러운 시절을 통과하는 중이었고 생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혼란스러워했어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를 보면 항상 걱정을 달고 살았던, 암흑기와 다름없는 시기였죠.
마침 그때 당신들이 부모님 댁으로 찾아왔어요. 거진 고등학교 졸업 후 거의 5년 만이었어요. 따지고 보면 우리는 제대로 ‘친구’라 명명하긴 어려웠어요. 접점이라곤 당신들과 언니가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라는 것 외에는 없었고, 우연히 복도를 지나다가 짧은 인사를 나눈 적만 있을 뿐이었죠. 십 대 시절 우리는 마음을 터놓고 말을 섞은 적이 거의 없었기에 각자의 기억에서 쉽게 잊힐 존재나 다름없었어요.
여름휴가를 맞이하여 온 것이지만,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오기를 망설였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내가 원치 않는다면 당연히 오지 않겠다는 말도 했었죠. 하지만 왠지 모르게 혼자 있고만 싶었던 그 시기에 나는 당신들을 만나고 싶었어요. 나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는 걸 허용할 수 있는 타인이 바로 당신들이 된 것이죠.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저 끌림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네요.
우리는 함께 막국수와 수육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서 마당에 모였어요. 셀 수 없이 많은 사진을 찍고 달리기를 하고 서로를 끌어안았죠. 당신들이 준비한 생일 케이크 앞에서 초를 불기고 했고요. 참으로 이상했어요. 당신들에게서 지나친 친밀함과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요. 그저 나만의 착각으로 치부해도 괜찮았지만, 당신들 역시 그랬다는 게 신기했어요. 마치 어제까지 연락을 주고받던 친구들 같았으니 말이에요. 우리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어요. “이상하다, 왜 이렇게 편하지. 너도 그래?” 그 이유는 간단했어요. 기본 전제가 다정함이었기 때문이죠.
짧은 휴가를 마치고 당신들이 떠난 뒤, 부모님은 오랜만에 크게 웃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내 모습을 보는 것이 무척 기뻤다고 전했어요. 물론 나도 그랬어요. 일말의 걱정도 없이 즐거움으로 충만했던 건 정말 오랜만이었거든요. 게다가 지속적으로 연락을 한 것도 아니고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마주한 당신들이 그 즐거움을 선사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어요. 그 뒤로 나는 조금씩 더 많이 웃게 되었고, 당신들과 만든 여름날의 추억을 자주 떠올렸어요. 그 추억은 어느새 내 일상의 터닝포인트가 되었고요. ‘그래, 나는 원래 주저 없이 말하고 활발하고 웃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이었지.’ 그걸 다시 인식하게 되자 삶을 살아갈 아주 작은 자신감이 고개를 들었어요.
연례행사처럼 푸른 여름이 다가오면 우리 집에 모이게 되었어요. 옥수수를 먹으면서 게임을 하고 아빠가 해준 밥을 먹으면서 부른 배를 툭툭 치고, 밤이 되면 불꽃놀이를 했어요. 졸업사진을 보면서 아침이 올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쏟아지는 별을 구경하기도 했죠. 우리는 코앞에 놓인 근심에 대해 털어놓기도 했고 고민을 나누면서 서로를 다독였어요. 지금 당장 우리를 걸리게 하는 일만 하나씩 해치우자고 말이에요.
해가 바뀐 뒤부터는 서울에 위치한 나와 언니의 집으로 당신들을 자주 초대하게 되었어요. 우리는 새벽까지 와인을 마셨고 천천히 돌아가는 턴테이블을 바라보고 현재의 삶과 낭만의 교차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노트북 화면에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과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유브 갓 메일>로 꽉 채워졌고 대화 도중 마음에 드는 장면이 나오면 서로를 바라보며 동시에 감탄사를 내뿜었죠. 그리고 좁은 집에 다 같이 모여서 몸을 부대끼며 잠을 청하고, 누구 한 명이라도 자지 않으면 쉴 틈 없이 입을 움직이며 다가올 아침을 기다리기도 했어요.
우리는 <쇼코의 미소>에 나온 문장과 같아요.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는 그 말. 나에게 우정은 연애예요. 아마 연애 이상일 지도 몰라요. 연인 관계보다 더 깊은 사랑, 그걸 우정을 통해 느끼기 때문이죠. 나는 당신들에게서 사랑을 포착해요. 특히 그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동자는 짜릿하고도 다정해요. 무슨 수로 그 눈동자를 외면할 수 있을까요. 나는 그 눈동자와 어우러지는 다채로운 감정에 입을 맞춰요.
연애에서도 감히 상상하기 힘든 일을 당신들이 준 적도 셀 수 없이 많아요. 매번 나에게 어울리는 꽃을 직접 골라서 건네는 일, 우울해하는 나를 위해 사울 레이터 전시에 데려가는 일, 직접 클래식 공연 티켓을 예매해서 선물하는 일, 손수 적은 정성스러운 편지를 전해주는 일, 간단해도 진심 어린 말을 선물해 주는 일. 그래서 내 삶에 또 다른 연애는 필요가 없어요. 이미 나는 당신들과 연애 중이거든요.
세상이 내 편은 아니지만, 우리는 서로의 편이 돼서 여러 가지 감정을 나누고 우리만의 세상을 만드는 사이예요. 늘 웃는 날만 있을 수는 없지만 요즘같이 시원한 날씨에는 엄청난 크기의 구름과 명명할 수 없는 예쁜 색의 하늘이 있어요. 이럴 때는 계절이 나에게 다정함을 선사하는 것만 같아요. 마치 당신들이 늘 가지고 다니는 다정함처럼요.
나는 회복 언저리즈음에 있어요. 완치는 확신할 수 없지만 내가 무사히 나아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덕분입니다. 생각해 보니 당신들에게 진 빚이 너무나도 많네요. 그래서 나는 그 빚을 전부 다 갚기 전까지 곁을 떠나지 않고서 정성스럽게 갚을 예정이에요. 이 다정함의 빚은 또 다른 다정함으로 채워줄게요. 그러니 만남을 이어 나가 봅시다.
차가운 빗 속을 일부러 뛰어가며 낭만을 만드는 사랑을 좋아합니다. 그런 나를 위해 일부러 함께 비를 맞아주는 당신들은 사랑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겠죠. 더불어 초단위로 하늘이 어떻게 변하는지 떠들 수 있는 감수성 가득한 사랑도 좋아합니다. 우리의 공통분모가 감성으로 짙게 물든 사랑이니까요. 나는 이런 사랑들을 많이 그리워하고 또다시 느끼고를 반복하고 싶어요. 앞으로도 나와 함께 이 사랑에 동참해 줄래요?
다정함이 있는 한 우리의 세상은 멸망하지 않아요.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어요. 끊어진 철도를 이어주고 울퉁불퉁한 바닥에 깔린 자갈을 치워주고 제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 옆에서 부축해 준 마음이 나를 살아가게 만들었죠. 그 마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황홀하게 밝혀주고 있어요. 아마 당신들에게 진 빚은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것만 같네요.
우리 또다시 와인을 마셔요. 차가운 소주도 좋고 탄산 가득한 맥주도 좋아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가도 좋고 매력적인 포장마차에 가도 좋아요. 무얼 먹고 마시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저 우리가 얼굴을 맞대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만 나눌 수 있다면요. 여름이 오기 전, 서로의 앞에 꼿꼿하게 서서 만납시다. 그리고 몸을 웅크리며 껴안아줍시다. 늦어도 괜찮아요. 기다리는 건 자신 있으니 오기만 해 주세요.
다정함이라는 무기는 사나운 총알도 폭탄도 녹여버리는 강력함을 가지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최후로 살아남을 거라 자신합니다. 꽃다발과 손 편지, 그리고 와인 한 병을 품에 안고 기다리겠습니다.
추신. 당연한 말이지만 때로는 인상을 찌푸려도 돼요. 그런다고 해서 우리의 다정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