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의 첫 만남은 재난 이후 벌어졌어요. 여기서 ‘재난’은 과장이 아니에요. 때는 내가 오사카에서 유학하던 중이었고, 갑작스레 큰 지진이 일어났어요. 건물 전체가 흔들리고 핸드폰에서는 재난 알림이 요란스럽게 울렸죠. 그리고 바로 다음날에 당신이 태어났어요. 나는 한국에 있는 형부가 보낸 사진을 통해 이제 막 세상 밖으로 나온 당신을 만났죠. 태명만 있었던 작은 아이가 힘차게 우는 모습. 재난이 한바탕 뒤엎고 간 뒤 찾아온 희망처럼 느껴졌어요.
마침 여름방학을 맞이해서 나는 두 주간 잠시 한국에 머무를 예정이었어요. 이 기간을 노려 당신의 뽀얗고 동그란 얼굴을 보러 갈 참이었죠. 당신에게 첫 선물을 사주고 싶었는데, 갓 태어난 아이에게 어떤 물건이 필요한지 하나도 알지 못했던 터라 겨우 지인의 도움을 받아서 큰 캐리어에 담은 일이 있기도 했답니다. 바다를 건너는 내내 기분이 묘했어요. ‘내가 이모가 되다니.’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게 될까요. 감이 오지 않아 애꿎은 흰 구름만 응시하면서 한국에 도착했어요.
어린 조카를 보면 마냥 예쁘기만 하다던데 나는 그렇지 않았어요. 예쁜 건 당연했지만 한편으로는 심란했지요. 당장 닥치지도 않은 미신 같은 사건을 꺼내서 마인드맵을 그리기 바빴어요. 당신이 밟고 뛰고 넘나드는 그 길이 어느 정도 눈에 보였기 때문일 거예요. 이런 고민을 더듬으며 나는 굳게 눈을 감은 당신과 마주했어요. 저 눈이 번뜩 뜨이는 날부터 당신만의 역사가 시작되겠구나, 하는 마음속 혼잣말을 애써 감추면서요.
눈에 보일 정도로 당신은 빨리 성장했어요. 입을 뻐끔거리며 모호한 단어를 내뱉는 당신을 보면서 나는 큰 벽과 직면하고 말았죠. 안아주려고 해도 피하고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 않았으니까요. ‘어떻게 해야 당신이 나를 좋아할까’, ‘나를 위험하지 않은 사람으로 인식할까’ 온통 그 생각뿐이었어요. 역시나 이모가 되는 과정에는 여러 변수가 존재하고 어려운 길이더군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림이 전부였고 나는 천천히 당신의 성장과정을 지켜보기로 했어요.
당신이 달리기를 좋아하는 아이로 조금 성장한 뒤부터 나를 기억했을 거라 짐작해요. 정확히는 나에게 ‘이모’라는 호칭이 아닌 ‘언니’라고 불렀던 날부터죠. ‘이모’가 아닌 ‘언니’라고 부르는 당신에게도 이모는 큰 어른처럼 느껴지는 존재였을까요. 그러기에 나는 왜소하고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거죠. 차라리 잘 됐다 싶었어요. 나는 어른이 아니니까요. 그저 친근한 언니이자 어린 이모 정도로 보이면 다행이었죠. 어느덧 ‘작은 이모’라는 말이 입에 어느 정도 붙자 당신은 수도 없이 그 단어를 내뱉었어요. 사랑스럽고 명랑하고 귀여운 표정을 한껏 자랑하면서요. 그제야 조금 안심했어요. 적어도 나를 싫어하지 않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참, 그거 알아요? 나에게도 이모가 있어요. 큰 이모는 생활력이 강하고도 마음이 여린 사람이고 막내 이모는 수다스럽고 친근한 사람이지요. 이모들은 나의 뼈를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살을 찌우게 해 준 고마운 사람들이에요. 나는 여전히 이모들이 좋아요. 그들의 아름다운 얼굴을 눈에 담으면서 컸고 정작 내 옆에 있지 않아도 가끔씩 생각할 만큼 애틋하거든요. 그만큼 나에게 이모라는 존재는 세상 좋은 말은 다 가져다 붙인 단어랍니다.
당신에게 이모들이란 어떤 존재로 각인될까요. 지금까지 나는 참 부족한 이모예요. 멀리 떨어져 사는 당신을 보러 가는 일이 적고 큰 선물을 사준 적도 많지 않아요. 그럼에도 당신은 덩치가 큰 사랑을 선사해 주었죠. 언젠가 서울에 온 당신과 맛있는 저녁을 먹고 사람 많은 길거리를 힘차게 걸어갔던 적이 있었지요. 그날 들뜬 기분을 한껏 내보이던 당신이 참 사랑스러웠어요. 당신은 어린이집에서 친하게 지내는 친구를 자랑스럽게 말하고, 밥을 먹는 나에게 휴지를 건네거나 손수 입을 닦아주기도 했어요. 감자튀김으로 내 얼굴을 만들기도 했고 할 말이 너무 많아서 고르는 것부터 난관에 빠진 얼굴을 하기도 했죠. 계속해서 “이모들 너무 좋아!“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내 품에 폭 안기기도 했어요. 가득 안긴 당신은 또 다른 세상 같아요. 투명하고 순수하고 작은 조각을 마음대로 이어 붙인 그런 세상 말이에요.
동작도 목소리도 커서 제가끔 제어하기 어려워 휘청이는 당신의 모습을 좋아해요. 그런 당신에게 많이 배우기도 해요. 당신은 또래에 비해 서운함을 잘 감추는 편이에요. 특히 작별할 시간이면 그런 모습이 도드라지게 나타나요. 우리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음 만남까지 시간이 꽤 걸려요. 당신은 섭섭함을 굳이 드러내지 않다가 이모들이 시야에서 멀어지면 그제야 눈물을 펑펑 흘리는 타입이죠. 자신도 슬프지만 울면 이모들도 슬퍼할까 봐 눈물을 참은 것이죠? 나중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 가슴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무너졌어요.
솔직하게 감정 표현을 해도 되는데 그걸 스스로 제어했다는 점이 안타까웠지요. 어린아이도 타인이 슬퍼할까 봐 마음을 억누르는데 다 큰 나는 너무 제멋대로 행동한 것은 아닌가,라는 반성도 했어요. 물론 가장 신경 쓰이는 점은 당신이 너무 일찍이 슬픈 감정을 숨긴다는 사실이에요. 나중에는 당신에게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라는 말까지 해주었죠. 눈물은 솔직함이고 어린 당신이 억지로 감내해야 할 일이 아니니까요. 그런 건 커가면서 차차 배우는 것이니 이른 나이부터 스스로를 통제하지 말았으면 해요. 잘 웃는 것처럼 울기도 잘 울었으면 좋겠어요.
비행기를 타야지만 직접 대면할 수 있는 당신과 나. 물리적 거리를 아예 배제할 수는 없지만 나는 심리적 거리가 더욱 중요하다 생각해요. 지금처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쉽게 연락이 가능한 세상에서 그런 것쯤은 무의미해지죠. 예전에 내가 당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사랑고백하듯 말했지요. “이모랑 민소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서, 이모가 민소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야. 이모는 민소를 정말 많이 사랑해.” 그러자 당신은 작고 동그란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응답했지요. “민소도.” 우리는 서로를 세차게 끌어안았어요. 얼굴을 맞대고 손깍지를 끼고 끌어안는 게 가장 좋은 건 맞지요. 피부에 닿는 온기만큼 애틋한 건 없으니까요. 하지만 서로가 가진 사랑만큼은 장거리도 방해하지 못해요. 생각보다 당신과 나의 사랑은 힘이 세거든요.
나는 당신을 보면서 소녀 시절을 회상해요. 유치원 때까지는 낯을 가리고 소심했지만, 나무 위에 올라가서 노을을 바라보고 엄마가 사준 책을 꾸준히 읽으며 사고를 조금씩 키워나갔죠. 십 대가 되면서부터 현재의 성격이 발현되었고 조금은 예민했지만 친구는 많아서 활발히 뛰어다녔어요. 나를 짓밟는 사람들이 등장해서 펑펑 울기도 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생채기를 낸 사람에게는 악을 쓰기도 했지요. 당신의 소녀 시절은 어떻게 흘러갈까요. 마냥 즐겁지만은 않을 테지만 너무 걱정 말아요. 당신의 곁에는 이미 그 시절을 지난 사람들이 든든하게 버텨주고 있을 거예요.
나는 당신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만큼 걱정이 더 많아요. 이건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지요. 이 걱정의 근원은 당신이 나와 같은 성별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부터 시작되었어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기분. 혹여 내가 겪은 차별이나 불행을 비슷하게 겪지는 않을지, 그로 인해 마음에 짙은 상흔이 생겨서 속상해하지는 않을지. 그렇다면 나는 그 길을 미리 지난 사람으로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고, 스스로를 지키고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 알려줘야 하는지. 이런 걱정과 고민이 쌍을 이루고 있죠. 머리를 싸매고 생각한 결과, 딱 세 가지만 당신에게 부탁하기로 했어요. 지금부터 말할 테니 차분히 들어줄래요?
사랑하는 당신, 마음껏 헤엄치고 질주하세요.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내뱉고 표현하면서 나아가세요. 그 누구도 당신의 헤엄과 질주를 막지 못해요. 당연한 말이지만 중간에 넘어져도 됩니다. 다시 일어설 힘은 자연스레 따라오니까 걱정 마세요.
다정함을 소중히 간직하세요.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당신의 다정함은 쉽게 가질 수 없는 재능이에요. 나는 당신이 다정함을 품에 안고 세상과 조우하길 바라요. 그건 당신을 끝까지 지켜줄 거예요.
저항하세요. 상식 밖에서 벌어지는 불의를 참지 마세요. 당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의 논리에 맞서세요. 벌써부터 다칠 염려는 하지 마세요. 당신을 지켜줄 사람들이 든든하게 서 있으니까요. 혹시라도 상처가 생기면 연고를 바르고 새살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면 돼요. 괜찮아요.
당신이 살아갈 세상은 내가 살았던 세상과 아주 미세하게라도 변하길 바라면서 나도 전진할게요. 조금이라도 덜 아프길, 그리고 더욱 찬란한 경험이 펼쳐지길 기도하면서 길을 닦아 놓을게요. 그리고 아직은 배울 게 더 많은 이모지만 당신을 이해하고 포옹하면서 다채로운 감정을 쌓도록 노력할게요. 당신이 내 품에 안겨주면 그 힘이 더욱 세질 것 같아요.
우리 5월에 보기로 했죠? 선물과 사랑을 담아서 찾아갈게요. 나는 지금부터 당신의 얼굴에 담긴 해사한 표정을 상상해요. 설레고 들떠요. 저번처럼 맛있는 밥을 먹고 따뜻하고 장난스러운 이야기를 나눠요. 신나서 방방 뛰기도 하고 큰 소리로 사랑 고백도 해봅시다. 정 많고 어여쁜 당신, 나의 조카, 씩씩한 소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 당신에게 보낼 편지는 앞으로도 많이 남아 있어요. 하나씩 뜯어서 읽어준다면 참 고마울 것 같아요.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게 있어만 주세요. 사랑해요, 나의 민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