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 없는 애정 서사

by 이낭만



모든 걸 쏟아부어서 사랑을 표현하는 당신. 크게 웃을 때 휘어지는 입꼬리가 시원하고, 촉각을 곤두세워 사람을 관찰하는 예민함이 멋지고, 바라는 것 없이 다정함을 베푸는 모습이 아름다워요. 털털하고도 애교가 많아서 그 성격이 나에게까지 이행되었어요. 자칫하면 뾰족하게 솟아서 부러졌을 내 독기와 성질이 거칠게 발현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신이 그 날카로움을 일일이 갈고 닦았기 때문이에요.


내 생일은 여름의 끝자락과 가을의 초입새 그 사이에 놓여 있어요. 어릴 때는 내 생일의 날짜가 애매해서 싫었어요.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항상 방학이었기에, 축하받는 걸 좋아하는 나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생일축하를 받는 일도 적어서 늘 불만이었어요.


그럴 때마다 당신은 쌍둥이 생일이 지나면 날씨가 점점 시원해진다면서 위로해 줬어요. 무더위는 사람을 축 늘어뜨리게 만들고 땀을 뻘뻘 흘리게 만들어서 찝찝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죠. 당신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나의 생일이 시기상 아름답다는 듯이 말을 해줬죠. 그때부터 내 생일이 좋아졌어요. 마법처럼 내 생일이 지나면 가을이 고개를 들곤 했으니까요.


나는 당신이 어린 나와 언니에게 만들어준 토끼풀 반지를 좋아했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손가락에 달린 뽀얗고 동그란 토끼풀 반지를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공주라도 된 것 마냥 폴짝폴짝 뛰었어요. 셋이서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잠을 자는 날이면, 당신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 싶었어요. 나와 언니는 당신에게 “엄마, 나 보고 자!”라며 논쟁하듯 말했고, 당신은 차라리 천장 보고 잘 테니까 너희들이 옆으로 붙으라고 했죠. 당신과의 기억을 반추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고 울컥해요.


우리는 취향이 비슷해서 만화나 영화를 수도 없이 많이 봤어요. 나는 당신이 아주 어릴 적부터 만화책을 손에 달고 살았던 걸 알았죠. 밤늦게까지 <여학생>, <내 이름은 신디> 등 많은 만화책을 사랑하고 즐겨 읽었던 당신. 나와 언니도 순정만화를 좋아해서 아파트 상가에 위치한 책방에 들락날락거렸죠. 언젠가 당신이 한시적인 우울감에 빠진 날, 나와 언니는 그 만화책들을 찾아서 중고로 구매한 다음 당신 앞에 선물처럼 놓았어요. 무척 기뻐하는 당신을 보며 나와 언니는 소소한 행복을 느꼈답니다. 그 뒤로 우리는 주방 식탁에 만화책을 잔뜩 쌓아서 하루종일 읽었어요. 내가 읽던 <다정다감>을 당신이 읽고, 당신이 좋아했던 <아카시아>를 내가 읽었죠. 서로의 취향을 공유하며 추억을 하나씩 만들어 나간 셈이죠.


당신은 어린 나와 언니의 손을 잡고 처음으로 극장에 데려갔어요. 그때 본 영화는 <천공의 성 라퓨타>였어요. 난생처음 보는 환상적인 세계와 마주한 그 순간은 내가 영화에 빠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죠. 그다음에 개봉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우리 셋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되었어요. 나와 언니를 위해 선물한 영화로 인해 그 이후부터 우리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모든 작품을 감상했고, 그 영화들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눴죠. 또한 <들장미 소녀 캔디>와 <베르사유의 장미>를 이틀에 걸쳐서 함께 보기도 했어요. 캔디가 웃으면 따라 웃고, 이별에 힘들어 훌쩍이면 마음 아파했어요. 오스칼에게 처해진 상황에 분노하면서 그녀의 안타까운 사랑에 많이 울기도 했죠. 이럴 때 보면 우리는 마치 동갑내기 친구 같아요. 아직도 봤던 애니메이션을 보고 또 보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니까요.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어요. 23살 때 홀로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떠나던 날, 나는 공항에서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인사를 했고 출국장으로 향했어요. 그날 당신은 차에서 계속 울었죠. 아낌없는 보살핌과 사랑을 준 어린 딸을 먼 타국으로 보내자니 마음이 얼마나 착잡했을까요. 몇 달 뒤, 당신은 언니와 함께 나를 보러 일본으로 왔고 우리는 셋이서 즐거운 식사를 했고 밤마다 생맥주를 마셨어요. 어두워진 오사카의 길거리를 걸으면서 따뜻한 바람도 느끼고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았죠.


돌아가는 날, 나는 처음 일본으로 떠나던 날처럼 애써 웃으며 손을 흔들었어요. 당신은 공항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던 중, 이미 사라진 내 자리를 바라보며 눈물을 훔쳤죠. 한국으로 데려가서 직접 한 음식도 먹이고 같이 잠도 자고 싶다고요. 나는 자식을 낳은 적이 없어서 부모의 사랑을 온전히 다 알 수는 없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눈시울이 붉어지는 당신을 보면서 아주 조금, 그 마음을 가늠해요.


나는 당신의 역사를 되짚어 보아요. 대학원 시절, 공부를 하면서 가장 마음에 남았던 책은 에이드리언 리치의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였어요. 당신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에요. 리치는 가정을 위한 희생, 아이만을 바라보는 맹목적인 사랑을 강요하는 ‘모성’을 가부장제가 만든 제도라고 비판했죠. 그 말에 엄청난 동의를 표했어요. 내가 받은 모성의 형체 역시 비슷했으니까요.


당신의 모성은 나에게 생채기 하나라도 생기는 순간, 가해자를 찾아서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소중한 내 딸한테 그딴 말을 하냐’며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 나에게는 적당한 훈육만 하며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며 넓은 품으로 안아주던 모습, ‘너와 언니를 동등하게 사랑한다’며 울던 모습. ‘자식‘이라는 이유로 나에게 감정을 소모하고 자신의 시간을 쪼개며, 일정 부분을 포기하던 당신의 모성. 사회가 부여한 모성이 당신에게 부담을 주는 바위 같다는 생각을 하는 동시에 내 존재가 얼마나 버거웠을지, 왜 진작 그 마음을 먼저 알아주지 못했는지, 여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미안함이 켜켜이 쌓여 갔어요.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유명한 가수나 성공한 사업가가 됐을 지도 몰라요. 오디션에서도 떨지 않았고, 무대 위에 서서 관중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죠. 회사를 다닐 때 노조위원장을 하며 리더십을 발휘했고, 불의를 보면 절대 참지 않고 주변인을 변호했어요. 당신의 특출 난 재능이 워낙 뛰어나서 엄마로서의 삶을 택하지 않았다면 재능을 발휘하며 살았을 거라 말하지만, 당신은 나와 언니를 만난 것이 가장 큰 축복이라고 단호하게 말해요.


스무 살의 나는 당신에게 이제 온전히 당신의 삶을 살라고 말한 적이 있었어요. 돌이켜보니 그 말은 선을 넘는 발언이었어요. 당신은 나와 언니를 힘들게 키웠고 넘치는 사랑을 주었고 우리를 보물이라 칭하는데, 그 시간들을 전부 무시하고 부정하는 말을 했던 거죠. 스스로가 그 시간을 축복이라 여기며 아직까지 기뻐하는데 그 속내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편협한 내가 함부로 판단한 거죠. 과거도 현재도, 앞으로 만들어 나갈 미래도 당신의 역사이자 능동적인 기록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어요.


한 사람의 정체성은 다채로워요. 당차고 씩씩한 딸이자 멋지고 든든한 직장 선배, 똑 부러지고 섬세한 엄마, 그리고 사랑의 가치를 명확하게 아는 사람이라는 말로 당신을 열거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당신의 모든 정체성을 좋아할 수밖에 없어요. 마치 불가항력처럼요. 이미 당신이라는 사람에게 많은 선물을 받았기 때문이죠.


쌍둥이와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요즘 들어 매일 유산소 운동을 하는 당신. 존재만으로도 멋있고 대단하고 따뜻한 당신. 나의 필명에 당신의 이름 중 한 글자가 들어가는 이유는 내 안에 당신이 준 사랑과 용기가 가득 담겨 있고, 그것이 나를 현재까지 이끌어주기 때문이죠.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이 편지로 그간 품었던 속내를 전부 다 표현할 수 없지만 내 마음이 전달되길 바라고 있어요. 우리는 나약하고도 강해요. 그립고 아팠던 순간을 나중에는 차분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처럼, 찰나에 불과한 소박한 행복도 반복해서 말하죠. 그러니 계속 추억을 만들어 보아요. 그러면 우리는 더 많이 서로의 피부를 매만지며 온기를 나눌 수 있을 거예요. 사랑해요, 은경. 온 마음을 다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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