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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낭소리 Sep 16. 2019

[다낭소리] 처음 만난 다낭

 처음 만난 다낭

 OJT가 시작되었다. 일주일 동안 내가 파견될 지역에 가서 기관을 방문하고 앞으로 살 집을 구하는 시간이다. 


 그동안 호치민보다는 작고 조용할 다낭에 얼른 가보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시큰둥한 마음도 있었다. 가면 뭐가 달라질까. 물론 매연은 이보다 덜하겠지만 딱히 별다를 게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대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겠지. 다시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나갈 생각을 하니 피곤과 설렘이 동시에 밀려왔다. 작은 것에 의미 부여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설렘 쪽에 좀 더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 OJT 출발일은 마침 내 생일이었다. 


 처음 임지가 ‘다낭’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아주 기쁘지도 들뜨지도 않았었다. 그저 ‘다낭 외대 학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한다.’라는 말에 바짝 긴장했을 뿐이다. 어엿한 일반 대학의 한국어학과. 단순한 흥미로 배우는 게 아니라 취업과 유학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공부하는 사람들. 그들을 만나려니 나의 부족한 한국어 지식과 경험이 미안해졌고 선임 단원의 보고서를 읽고 나니 더욱 부담되었다. 사실 봉사자로 가든 교사로 가든 내가 누군가의 인생에 아주 큰 영향을 줄 수는 없는 거다. 그걸 알면서도 당시 나는 열정에 도취되어 필요 이상의 겁을 집어먹었었다. 


 현지어 선생님이 다낭에는 거지가 없다고 알려 주셨다. 정부 주도 하에 다낭을 관광 도시로 개발했을 때 다 쫓아 버렸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다낭은 특화된 계획도시일 뿐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논이 펼쳐지는 시골이라고 했다. 또한 다낭이 속한 중부는 베트남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해마다 태풍을 겪고 큰 피해를 입어 매년 전국에서 모금운동을 할 정도라고 했다. 중부는 베트남 전쟁의 피해를 가장 크게 입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 마음이 쓰였다. 


 공항을 나가자 학생 몇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쁜 코워커 선생님을 대신해 다낭 외대 학생들이 나를 도와주기로 했다. 베트남에 도착한 후로 내가 줄곧 기대했던 것은 학생들과의 만남이었다. 생각보다 한국말을 더 잘해서 놀랍기도 귀엽기도 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바로 학교로 향했다. 


 다낭 외대 선생님들은 낯선 한국인의 등장에도 딱히 놀라거나 궁금해 하지 않았다. 코이카 봉사단원을 비롯해 여러 기관에서 파견된 한국인 강사를 많이 만나봤기 때문인 듯했다. 강사진 대부분이 한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했고 부수입으로 통번역 일을 하며 한국인을 곧잘 만난다고 했다. 이미 관광객뿐만 아니라 다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많았다. 


 학교 사람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한 뒤 바로 업무 협의에 들어갔다. 코이카 단원을 오래 받아 온 기관이라 단원에게 요구하는 바가 명확했고 내가 할 일은 그 요구에 맞춰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보통은 새 학기에 맞춰서 일을 시작하는데 이번에는 임신한 선생님이 계셔서 내가 부임 후 바로 수업을 이어 맡기로 했다. 기관에서는 내게 적응할 시간을 못 줘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나는 그게 더 좋았다. 쉬어봤자 집에만 있을 게 뻔했으니. 


 공항으로 마중 나왔던 학생들이 내게 다낭을 소개해 주었다. 학생들은 나에게 개구리 죽을 먹였고 처음 보는 카페와 바다로 이끌었다. 이동할 땐 오토바이를 이용했다. 오토바이는 호치민에서도 타 본 적이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어디를 잡아야 할지 몰라 어정쩡 앉아 있는데 앞에 탄 여학생이 허리를 잡으라고 했다. 잔뜩 겁먹었을 외국인 선생님을 위해 운전하는 중간 중간 ‘선생님 괜찮아요?’하고 물어봐 주는 학생의 마음이 고마웠다. 나를 배려해 천천히 달리는 것 같은데도 무서웠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내릴 때쯤엔 학생의 티셔츠가 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간판에 그려진 그림을 제외하면 개구리 죽도 꽤 괜찮았다.
조막만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게 더 힘들었다.


 천 원짜리 밥을 먹고 3천 원짜리 커피를 마시는 건 내가 대학생 때 했던 행동과 똑같았다. 커피를 포장해 밤바다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한국어 선생으로서 나는 당연히 ‘한국어를 왜 배우게 되었는지, 졸업 후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물어봤다. 망설임 없이 “취업”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맞다. 직업을 갖고 경제활동을 한다는 게 얼마나 귀한 일인지 잠시 잊고 있었다. 나 역시 언어학을 공부한 사람이고 언어로 돈을 벌었다. 그리고 학문과 남을 돕는 일을 해보고 싶어 봉사자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현재 돈벌이를 하지 않는 내가 매달 보험료나 휴대폰 약정 값을 낼 수 있는 것은 과거에 일을 했기 때문이다. 학생들과 대화하다 보니 짧은 업무회의에서보다 내 역할이 더 분명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이들에게 선물을 받았다. 쪼리를 신어 본 적 없는 나는 그걸 신지도 못하고 곱게 모셔 두고만 있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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