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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낭소리 Sep 21. 2019

[다낭소리] 말하기 시험 감독

 말하기 시험 감독

 아침부터 칼바람이 부는 추운 날이었다. 가히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날. 말하기 시험 감독을 위해 아침 7시부터 집을 나섰다. 내가 가르친 과목은 아니지만 현지 선생님의 부탁이 있어 부감독을 맡기로 했다. 


 학교에 도착하니 시험을 기다리는 학생들이 추운 복도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걱정되었는데 다행히 빈 강의실을 빌려서 학생 대기실을 따로 만들어 줄 수 있었다.


 문제는 나였다. 어제 녹차 한 잔을 마셨더니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큰 컵에 찻잔에 든 것을 한 반쯤 마신 것뿐인데 요새 왜 이렇게 카페인에 약한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집중력이 흐트러질까 봐 아침에 커피 한 잔을 냉큼 마시고 왔다. 빈속에 뜨거운 커피를 집어넣었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배는 고프고 날은 춥고…. 블라우스 안에 히트택을, 바지 안에 레깅스를 입고 왔는데도 손발이 달달 떨렸다. 


 그래도 긴장해서 울음을 터뜨리거나 덜덜 떠는 학생들을 눈앞에 두고서 감히 몸도 마음도 흐트러질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내가 다 안타깝고 속상한데 그렇다고 점수까지 후하게 줄 수는 없어서 너무 미안했다. 내가 가르친 학생들이 아니니 주어진 평가표 외에 다른 점수를 줄 수도 없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긴장을 풀어주려 "괜찮아요."를 반복하고 웃으며 말을 걸어주는 것밖엔 없었다. 그리고 잘했든 못했든 시험이 끝나면 고생했다고 격려해주는 것뿐. 


 교육의 길에 들어선 뒤로 늘 생각나는 교수님 한 분이 있다. 평소 열과 성의를 다해 가르치셨고 분별력을 두기 위해 시험 문형도 참 다양하고 세세하게 출제하셨다. 그 교수님의 회화 시험이 있는 날이면 늘 날 밝을 때 시험장에 들어가서 해질 무렵 나오곤 했었다. 그 늦은 시간까지 집에도 못 가고 우리와 함께 남아 계시면서도 이제 그만 끝내라고 눈치를 주거나 지친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셨다. 


 시간제한이 없었던 시험. 마지막 학생이 시험지를 제출할 때까지 같은 공간에서 기다려주셨던 교수님. 수업 구상을 하고 교안을 짤 때마다 그 교수님이 생각난다. 그분이 내게 주셨던 것을 지금 나도 같은 마음으로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 있는지. 그만큼의 애정과 열정이 내게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중간 쉬는 시간을 이용해 재빨리 쌀국수 한 그릇을 먹고 났더니 기운이 좀 났다. 한 세 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던 시험은 12시까지 이어져서 결국 점심을 먹고 다시 시험을 진행하기로 했다. 


 오늘은 말하기 시험이라 부정행위에 대한 부담은 없다. 첫 시험 감독 신고식으로 호되게 가슴앓이하고 난 뒤 나는 학생들 사이에 소문난 엄한 감독관이 되었다. 한 학생의 말로는 내가 시험 감독관인 것을 알고 나면 학생들 사이에 ‘큰일 났다’라는 소리가 오고 간다고 한다. 내 참. 자기가 공부한 것을 적어 놓고 나가면 되는 시간에 내가 있다고 해서 큰일 날 건 또 뭔지.


 이후 베트남에서 활동하는 단원들과 시험 중 부정행위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공통된 의견은 학생들이 커닝을 많이 한다는 것이었고 심지어 성적에 반영되지 않는 동아리 자체 평가에서도 커닝을 한다고 했다. 시험지에 이름을 적으니 자기가 틀렸다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건지 커닝이 습관화 되어 자연스럽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오후 시간에는 유독 잘하는 학생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같이 감독하는 선생님이 학원 다니는 애라고 콕 집어줬다. 학원에서 미리 원고를 교정 받고 왔으니 그대로 외우기만 한다면 틀릴 수가 없는 것이다. 입 안이 썼다. 거의 대부분의 학문이 그렇겠지만 언어는 유독 그렇다. 기회의 차이가 실력의 차이를 만든다. 그리고 그 기회는 대부분 돈 많고 시간 많은 사람들에게 돌아갈 때가 많고. 씁쓸하다. 


 한 학기의 종착점. 아침 7시 30분에 시작한 시험은 저녁 6시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말 그대로 대장정이었다. 빈 강의실의 불을 끄고 나오는데 문득 나의 학창 시절이 생각났다. 


 자신 있게 눈을 빛내며 말을 하고, 준비한 답이 기억나지 않아 당황하고 또 어떻게든 말을 이어 나가려 애쓰는 그 모습 안에 내가 있었다. 암기한 문장 외에 다른 질문을 던지면 말문이 막히거나 자신 있게 답변하고 난 뒤 뿌듯해하는 그 모습을 보며 지난날의 내가 생각났다. 스무 살 무렵의 나는 배움이 즐거웠고 열정 가득했다. 그렇지만 때때로 자신감이 부족했고, 너무나도 바빴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교수님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지금의 나처럼 안타깝고 기특했을까. 


 저녁 먹으러 들린 한식당에서는 마침 우리 반 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추위에 떨어서 꾀죄죄한 몰골은 뒤로 하더라도, 호기롭게 다섯 접시를 내리 주문한 뒤엔 슬쩍 민망해졌다. 학생은 일하는데 우리만 먹는 게 미안하면서도 이렇게 마주친 게 내심 반가웠다. 학교 특성상 기말고사 기간을 3주로 잡고 그 전 주는 또 시험 공부하라고 수업이 없다. 시험 감독도 내가 가르친 반을 맡는 게 아니라 학교에서 지정해주는 대로 배치되기 때문에 근 한 달 만에 본 얼굴이었다. 


 몇 안 되는 베트남어로 응원도 하고 시험 기간이니 공부도 열심히 하라며 어설픈 잔소리를 내뱉고 나온 길. 그래도 베트남어로 한마디 했다는 게 뿌듯하고, 내심 내가 다시 와서 인사해주길 기다린듯했던 학생의 표정과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 이 하루. 너무나도 길었지만 그간 굳어있었던 생각과 마음에 다시금 생기를 주었다. 맞다, 새치도 주었다. 다른 선생님 손에 들린 내 머리카락은 분명 흰색. 새치라니, 이 나이에 내가 새치라니…!


베트남에서는 나무 젓가락을 사용한다. 어딜 가든 무료로 주는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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