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나는 장손이다. 할아버지는 나를 무척 예뻐해 주셨다. 마실 나서는 아침이면 손수 내 얼굴을 씻기시고 머리를 물로 살짝 적셔서 작은 빗으로 정갈하게 2:8 가르마를 타 주시곤 하셨다. 나는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서울 이곳저곳을 구경 다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여느 때처럼 자전거로 동네를 나서셨다가 덤프트럭에 받히셨다. 생명유지장치를 붙이고 의식 없이 계시다가 영면하셨다. 사고사여서 집안 장례기간 내내 친척들은 크게 슬퍼했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터라 마음이 많이 아팠음에도 정작 나는 울지 않았다. 친척들로부터 전해지는 묘한 비난의 눈빛을 받으면서도 이상하게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입관하던 날 사람들의 눈물이 말라갈 즈음 나는 봇물 터지듯 통곡하며 울음이 터져 나왔다. 통제되지 않는 감정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상황은 달랐지만 엄마의 죽음을 정리하는 뫼르소를 보면서 할아버지의 죽음 을 마주했던 내 모습이 겹쳐졌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사회적 통념에 맞게 적절하게 감정표현을 하지 못했던 뫼르소는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을까.
엄마의 부고를 접하고 장례를 치르면서 주인공은 왜 그렇게 무심하게 행동했을까. 마리가 결혼하자는 물음에 또 왜 그렇게 대답했을까? 관성적으로 나는 뫼르소의 인격을 한마디로 규정하고 싶었지만 적당한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미친놈, 허무주의자, 염세주의자, 아싸,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그 어떤 말도 딱 들어맞지 않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은 때로 미친 행동을 하기도 하며, 종종 인생에 허무를 느끼고, 반항적이기도 하고 반사회적인 일탈을 상상하기도 한다. 다만 이것들을 이성으로 덮어둔 채 사회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살아간다. 통념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뫼르소의 행동양식은 우리 안에 이성으로 꽁꽁 묶인 채 잠들어있는 뫼르소적 일탈들을 언뜻언뜻 깨우며 대리만족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한 경관이 나에게 담배를 권했지만 나는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조금 뒤 나에게 ‘긴장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사실, 직접 재판을 본다는 게 흥미롭기도 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런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뫼르소는 재판의 직접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남의 일 보듯 행동한다.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고 있지 못한 채 천진난만한 아이와 같은 말을 한다. 자기 삶에 있어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주인 노릇을 하는 부조리한 현실에 뫼르소는 의구심과 반항을 표출한다. 재판 당사자인 자신이 빠진 채 다른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현실을 보며 뫼르소는 낯선 공간에 서있는 것처럼 느낀다. 내가 인식하는 나와 타인이 인식하는 나 사이의 거리가 어떻게 부조리한 현실을 만들어 가는지 뫼르소의 심리묘사로 잘 보여준다. 까뮈는 현실의 모순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뫼르소라는 극단적 인간을 등장시키는 충격요법을 의도한 것일까. 얼마 전에 본 뉴스가 떠올랐다. 영아를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었다. 철없는 부부는 아기를 반려견들과 두고 나가면서 일말의 걱정도 하지 않았다. 우리 주변은 온통 사회와 괴리된 채 실존하는 뫼르소들 투성이일까.
모든 사람들이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안다.
서른 살에 죽든 예순 살에 죽든 결국에는 다 죽게 된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사람들은 모두 특권이 있다. 이 세상에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언젠가 사형 선고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역시도 사형 선고를 받을지 모른다. 혹시 그가 살인범으로 고발되었는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처형을 당한다 해도 그게 그리 중요한가?
대학 때 민중가요를 접했다. 김민기의 '늙은 군인의 노래’도 그때 배웠다. 우리는 '묻히면 그만이지'라는 1절의 중간 후렴구를 모든 가사의 뒤에 붙여서 부르곤 했다. 엠티를 가거나 농활을 나가서 몸을 쓰는 일을 할 때 친구들과 그렇게 장난스럽게 부르곤 했다. 어차피 죽을 거라는 자조가 담겨 있는 개사였다. 매일 86,400초를 동동거리면서 사는 것과 주어진대로 현재를 즐기며 사는 인생은 얼마만큼 성과차이가 있을까. 개사된 노래처럼 묻히면 그만인 것을. 뫼르소는 심지어 그것을 특권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부조리한 삶 속에 누구나 동등하게 누릴 수 있는 특권. 그런 마당에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그의 하느님, 엄마의 사랑, 그런 게 뭐가 중요하다는 말인가 되묻는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는 것, 조금도 다를 게 없다는 것을 그에게 딱 부러지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은 결국 별로 소용이 없는 일이었고 또 귀찮기도 해서 단념하고 말았다.
보통사람의 장점이 어떻게 하면 범인으로 몰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세상은 부조리하며 모순과 비이성으로 가득하다. 교육을 통해 비이성, 부조리에 동화되고 맞춰진다. 그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은 일탈이며 책임을 받게 된다. 이성적이고 조리 있는 우리의 본모습은 아웃사이더나 루저로 취급받게 된다. 그것이 바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문명인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정말 오랜만에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삶의 끝에서 ‘피앙세’를 가졌는지, 왜 새로운 삶을 꾸리려고 했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그곳에서, 생명이 쇠해가는 그 요양원 근처에서도 마찬가지로 저녁은 서글픈 쉼과 같았다. 그렇게도 죽음에 가까운 곳에서 엄마는 자유를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준비를 했던 게 확실하다.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준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이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통을 씻어내고 희망을 비워낸 것처럼 이 신호와 별들로 가득한 밤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세상의 부드러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었다. 세상이 나와 그렇게 닮았다는 사실을, 마침내는 세계와 내가 형제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내가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로울 수 있도록, 나는 사형이 집행되는 그날에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고함으로 나를 맞이해주기만 바랄 뿐이다.
뫼르소는 임박한 자신의 죽음으로 모두에게 주어진 그 특권의 가치를 알게 된 걸까. 허무주의의 음지에서 양지로 사고의 전환을 하는 주인공은 엄마의 요양원 생활을 이해하게 되면서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를 찾는다. 자신이 무관심했던 세상 역시 자신의 죽음 따위엔 무심하게 시간을 따라 흘러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의 존재와 본질이 세상의 그것들과 별반 차이가 없음을 알고 행복과 평안을 되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