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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선택은 이성적인가?

'노인과 바다'를 읽고

by 타마코치
한 늙은 어부가 석 달 가까이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의 이름은 산티아고. 어린 소년만 그를 따를 뿐 마을의 어느 누구도 그를 가까이하지 않는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홀로 자신의 쪽배를 타고 조업에 나선다.
배보다 큰 청새치 한 마리가 그의 낚싯바늘에 걸려든다.
물고기와 사투가 펼친 끝에 청새치를 잡아 배 옆에 단단히 묶고 항구로 향한다.
돌아가는 길 청새치의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를 만나 또 한 번의 사투를 벌인다.
상어에게 다 뜯긴 앙상한 청새치의 뼈대와 함께 항구에 도착한다.
늙은 어부는 지친 몸을 누인 채 아프리카 사자를 꿈꾸며 잠든다.


중학교 때 처음 '노인과 바다'를 읽고 나서 '쏘 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을 만났을 때도 느낌은 비슷했다. 중년이 되어 다시 펼친 '노인과 바다'에 나는 깊이 몰입했다. 산티아고가 평생 처음 만난 크기의 청새치를 잡기 위해 심연에 몰입했던 것 처럼. 소설은 늙은 어부의 단조로운 일상을 짧은 호흡으로 섬세하게 그렸다. 이러한 몰입감은 청새치와 수싸움을 하는 산티아고 노인의 독백과 심리를 묘사하는 장면에서도 잘 드러났다. 반전을 기대하며 읽어 내려가는 독자를 외면하듯 소설은 평범한 여운으로 마무리된다.


요즘은 '좋은 하루 보내세요' , '축하해!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래요'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말속에 담겨있는 축원의 의미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런 인생이 없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공허함을 느끼면서도 도식적으로 뱉어낸다. 그 외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평범한 삶 저 너머에 미지의 행복이 있을 거라는 바람을 담을 뿐이다. 성취된다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낙심하지 말자는 암묵적인 삶의 지혜 같은 것이다. 중년이 되어 다시 만난 '노인과 바다'는 부조리한 삶 속에 밝혀진 촛불처럼 인간 정신의 승리를 보여준다. 오글거리는 이런 상투적인 말이 고백처럼 흘러나왔다.


사람은 파멸당할 수 있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인생은 입안에서 단침이 고이게하는 사탕이라기보다는 오래도록 씹을 때 은근한 닷맛을 내어주는 쌀밥과 같다. 우리는 끊임없는 도전을 통해 인생을 맛보며 살아간다. 그것은 단맛이기도 쓴맛이기도 신맛이기도 하다. 이 모든 맛을 다 더해보면 인생은 담백함 그 자체가 아닐까. 산티아고는 청새치를 잡기 위해, 또한 잡은 청새치를 상어 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다시 굴러 떨어질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왜 위험을 무릅쓰며 청새치를 쫒았을까. 읽으면서 그의 심리가 궁금했다. 내가 산티아고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독자라면 한 번쯤 상상해봤을 가정을 해봤다. 팔십이 넘은 노구는 조각배보다 더 큰 청새치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을 테고 십중팔구 줄을 끊고 플랜 B로 넘어갔을 것이다.


산티아고의 선택은 비이성적이다. 인생이 흥미로운 이야기가 되는 것은 비이성적인 선택때문이다. 산티아고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고 싶었던 걸까. 산티아고의 선택에 갸우뚱하지만 비이성적인 선택은 누구나 한다. 남을 위해 자신 목숨을 내놓거나 질 것이 자명한 싸움에 도전을 하기도 한다. 인간은 비이성적이기 때문에 인간일 수 있다. 인공지능은 비이성적 선택을 하지 않는다. 계산된 선택에서 벗어나지 않기에 어떤 감동도 없다. 바위 밀어 올리기를 포기한 시지프스는 더 이상 신화가 될 수 없듯이 산티아고 노인이 청새치를 포기하고 돌아왔다면 소설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삶에 지쳐 바위 밀어 올리기를 포기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간혹 접한다. 파산해서 실의에 빠졌거나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이다. 노인의 짧은 독백을 인용하자면 그들은 패배한 것이 아니다. 단지 장렬한 파멸을 맞은 것이다. 되뇌며 읽을수록 인간 존재의 위대한 정체성이 선명해진다. 우리는 패배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단지 파멸당할 뿐이라는 것이다. 설령 우리가 지쳐 쓰러져 있을 때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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