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Book bless you

내게 무해한 사람

by 타마코치

나쁜 어른, 나쁜 작가가 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쉽게 말고 어렵게, 편하게 말고 불편하게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과정에서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느끼고 싶다. 그럴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 될 수 있기를
- 작가의 말 중에서



최은영의 두 번째 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은 독자들을 불편하게 한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녀의 전작 <쇼코의 미소>가 눈물샘을 자극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내게 무해한 사람’은 독자들에게 반복적으로 묻는다. 당신은 무해한 사람인가? 살면서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불편한 글솜씨로 독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그녀는 분명 유해한 사람이다.


일곱 가지 결이 다른 이야기 속에 사랑, 우정으로 정의된 관계들이 게으르게 점멸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단지 시간 속에서 빚어지는 완성과 파열일 뿐이다. ‘물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변형될 뿐...’ 관계는 사라져도 기억은 우리의 몸 어딘가에 어떤 식으로든 남아있다고 비유하고 있는 듯하다.


소설은 여성성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작가는 결국 관계 속에 발라진 감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은 여성성과 우정의 밑바닥에 흐르는 모티브이다. 초콜릿 같은 언어유희나 감각적인 사진의 선명함, 잘 편집된 동영상의 발랄한 호흡도 찾아볼 수 없다. 불편한 언어를 통해 편리함 속에 퇴화된 우리의 감정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것은 말하지 않았던 우리의 기억이다. 이제는 삼십 대가 된 주인공들이 자신들의 십 대, 이십 대의 기억을 돌아본다. 낡은 사진 속의 기억들이 더욱 선명한 것은 매듭짓지 못한 마음의 부채 때문이 아닐까? ‘의도치 않게 누군가를 배반하고 그에게 상처를 주었던 순간’을 기억하며 사실은 자신이 유해했음을 깨닫는다.




그 여름


‘네가 아픈 걸 내가 고스란히 느낄 수 있고, 내가 아프면 네가 우는데 어떻게 우리가 다른 사람일 수 있는 거지? 착각이 지금의 우리를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들로 만들었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막상 그 생각을 말로 표현하고 나니 그 말이 껍데기만 번지르르한 거짓처럼 느껴졌다.’


‘수이는 시간과 무관한 곳에, 이경의 마음 가장 낮은 지태에 꼿꼿이 서서 이경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수이야, 불러도 듣지 못한 채로, 이경이 부순 세계의 파편 위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곳까지 이경은 손을 뻗을 수 없었다.’




601, 602


‘학급 게시판에 붙어 있는 효진이의 가족사진은 완벽한 가족의 한 때를 붙잡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네가 착하게 굴어야지 엄마가 아들 낳지.’


‘남의 집 일에 나서는 거 아니야.

엄마

네가 나선다고 뭐가 달라져?

그래도 엄마.......

오늘 넌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야.

그 말을 하는 엄마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넌 여자애야.’


‘엄마가 아들을 낳았어. 나에게도 남동생이 생겼다.

나는 효진이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 그렇게 썼다.

이제 우리는 누구보다도 행복해진 거야. 우리는......’




지나가는 밤


‘혼자를 견디지 못하고 사람을 찾게 될 때가 있잖아. 그게 잘못은 아니지. 외롭다는 게 죄는 아니지. 알면서도 왜 네가 그러고 지내는 모습을 견디기 힘들었을까. 너에게서 내 모습이 보여서였나 봐. 그게 너무 지긋지긋해서 그랬나 봐. 나도 그랬으니까. 나는 그저 그 마음을 억눌렀던 것뿐이었으니까.’


‘기도가 통하는 세상이면 그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니겠지. 정말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그럼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은 간절히 살기를 바란 게 아니란 말이야?’


‘기억나지 않는 시간은 어디로 가는 걸까?’




모래로 지은 집


‘나는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지 못해. 어쩌면 사랑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무서운 일이라고, 두려운 일이라고 생각해.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알리바이로 아무 짓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 식으로 내가 나를 따돌렸던 것 같아. 너희에게 보여주지 못할 정도로 미워 보이고 창피했던 내 모습을 따돌렸어. 예전부터 그랬었어. 왜 내 모습이 그렇게 부끄러웠을까. 왜 나 스스로가 그렇게도 못나 보였을까.’


‘중력도 마찰력도 없는 조건에서 굴린 구는 영원히 굴러간다.’


‘우린 중력과 마찰력이 있는 땅에 살고 있어서 다행이구나. 가다가도 멈출 수 있고, 멈췄다가도 다시 가 수 있는 거지. 영원할 순 없겠지만, 이게 더 나은 것 같아. 이렇게 사는 게.’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사랑할 수 있다는 것도 완전함 때문이 아니라 불완전함 때문에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몸은 그렇게 반응했다.’



고백


‘시간이 상처를 무디게 해 준다는 사람들의 말은 많은 경우 옳았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진상을 알아갈수록 더 깊은 상처를 주기도 했다.’


‘우리는 때때로 타인의 얼굴 앞에서 거스를 수 없는 슬픔을 느끼니까. 너의 이야기에 내가 슬픔을 느낀다는 사실이 너에게 또 다른 수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채로.’




손길


‘어른들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같이 증오할 사람 하나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사람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위태롭고 위험한 것인지 여자로부터 배운 셈이라고 혜인은 종종 생각하곤 했다. 사람은 그런 식으로 쉽게 행복해질 수 없는 법이라고.’


‘어두운 쪽에서는 밝은 쪽이 잘 보이잖아. 그런데 왜 밝은 쪽에서는 어두운 쪽이 잘 보이지 않을까. 차라리 모두 어둡다면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서로를 볼 수 있을 텐데.’




아치디에서


‘들리는 것이라고는 바람 소리, 바람이 나뭇잎에 부딪치는 소리, 새들 소리, 가끔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노인들이 이야기하는 소리, 기침 소리, 웃음소리뿐이었다. 이런 소리는 사람을 지치게 하지 않아.’


‘이 정도로 간편하게 정리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대체 왜 우리는 그렇게 수없이 만나고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한 거지. 너는 나를 지나가는 사람쯤으로 대하고 있어. 나는 네 눈빛 앞에서 너무나 형편없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들어. 그 자리에 앉아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최은영은 관계가 단절되는 지점을 잔인하리만큼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이것이 짙은 애상을 자아내는 것은 우리가 이 단절에서 어떤 결정적인 이유나 잘못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특별한 치유의 순간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우리가 유일하지도 소중하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대체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여름날의 불꽃놀이보다는 이 불꽃놀이가 끝난 후의 기나긴 여운과 닮아 있다.



마치 핀홀카메라를 들고 있는 노련한 사진사처럼 작가는 민감한 감각으로 십 대, 이십 대들의 우정과 사랑에 집중한다. 풋풋했던 순수함과 그로 인해 서로에게 남은 상처들은 낡은 사진 속에 서늘한 기억으로 남겨졌다. 그것들을 대면하며 한 걸음씩 들어가 각자의 오랜 기억들을 상기시키며 공감을 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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