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김영하
멀미의 기억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편안한 믿음 속에서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난 이상, 여행자는 눈앞에 나타나는 현실에 맞춰 믿음을 바꿔가게 된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정신이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의 믿음에 집착한다면 여행은 재난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35쪽
오랫동안 품어왔던 멋진 환상과 그와 일치하지 않는 현실. 여행의 경험이 일천한 이들은 마치 멀미를 하듯 혼란을 겪는다. 반면 경험이 풍부한 여행자들은 눈앞의 현실에 맞춰 즉각적으로 자신의 고정관념을 수정한다. 36쪽
멀미를 처음 한 것은 오징어배에 동행취재를 갔었을 때였다. 키미테라는 패치를 귀 뒤에 붙이고 단단히 마음먹고 나섰다. 그러나 배가 공해에 정박하고 얼마 뒤부터 멀미가 시작됐다. 무박 2일의 짧은 일정이 한 달처럼 느껴졌다. 밤새 속을 비워내고 지친 심신을 이끌고 돌아와 다시는 배를 타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하며 뭍을 밟았을 때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여행은 불편함을 이겨내는 것이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처럼 호사스러운 여행도 집에 거하는 것만 못하다. 그럼에도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또 여행의 불편을 감수하기로 결심해놓고 편안한 여정이기를 바라는 것은 무슨 모순인가? 한때 캠핑을 열심히 다녔다. 소박한 장비에서 시작한 것이 편리함 때문에 하나 둘 캠핑 살림이 늘었다. 벽이 얇은 천일뿐 거의 집살림을 옮겨놓은 것 같았다. 집에 있는 것처럼 편해질수록 캠핑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다.
결심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 날 이후 난 배를 타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 혼미했던 무박 2일의 기나긴 여정이 가끔씩 그립다. 그날 멀미가 없었다면 뇌리에 오래 기억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멀미를 느끼고 싶어 여행을 떠난다. 헤쳐나갈 수밖에 없는 낯선 상황들이 불편하고 싫다면 여행을 감행할 이유가 없다. 집을 여행지라고 생각하면서 안온함을 누리면 된다.
일탈과 중독
모든 인간에게는 살아가면서 가끔씩은 맛보지 않으면 안 되는 반복적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약발'이 떨어지기 전에 이런 경험을 '복용'해야, 그래야 다시 그럭저럭 살아갈 수가 있다. 55쪽
이렇듯 인간이 자기도 모르게 입력된 어떤 프로그램에 따라 살아간다고 하면, 자유의지라는 것이 때로 허망하게 느껴진다. 인생은 눈에 보이는 적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어떤 허깨비와 싸우는 것일지도, 그게 뭔지도 모르는 채로. 63쪽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64쪽
우리는 욕구 해결에 바탕을 두고 살아간다. 각자 무의식에 각인된 프로그램에 따라 추구하는 욕구도 다양하다. 매슬로우는 그것을 5단계로 분류하였다. 상위의 욕구 추구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기초적인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 인간은 동물의 몸과 신의 영혼을 갖고 불완전하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무의식에 각인된 오래된 프로그램은 이따금 우리를 동물적 본성으로 때로는 신의 본성으로 이끈다.
'가끔씩은 맛보지 않으면 안 되는 반복적인 경험', 그것은 소심한 일탈이다. 엄격한 규칙 가운데 그것마저도 없었다면 세상은 정말 재미없는 곳이 되었을 것이다. 일탈은 그 충격이 멀미를 일으킬 만큼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일탈을 꿈꾸는 이유다. 가끔 결행하는 소심한 일탈들로 우리는 회복되고 재충전된다. 그러나 일탈이 자주 반복되면 그것은 '중독'이 된다. 판정을 받아야만 중독자가 되는 건 아니다. 중독이라는 말을 붙여줄 만한 준중독자들이 적지 않다.
비 여행, 탈여행
자기 속에 타자의 관점을 지니는 것, 그 대상이 장소일 경우 그것은 전통적으로 여행과 결합된 경험 - 전능의 환상 속에서 미지의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 에 대립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정신을 풍요롭게 해주는 이 경험을 우리는 탈여행이라 명명할 수 있을 터. 114쪽
기억은 때때로 우리를 곤란하게 한다. 기억력에 의존해 시비를 가리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약속을 기록하고 문서화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 보고 들은 것을 다 알고 기억한다고 착각한다. 같은 여행지를 다시 찾으면 이전에 보지 못했던 흥미로운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예전의 기억과 느낌, 그동안에 그 여행지를 다녀온 사람들의 생각 등 삶에서 쌓인 경험과 연결되면서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여행은 일인칭적 시각이라는 한계가 있다. 소설을 읽듯이 나를 객관화해서 보는 것을 비 여행 혹은 탈여행이라 했다. 이것은 독후활동에 비교할 수 있다. 자신의 여정과 경험을 다시 곱씹어보고, 기록하고, 다른 사람과 생각을 나눠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는 한 패키지여행을 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전투적 여행으로 남겨진 여운과 추억은 얼마 되지 않는다. 백과사전의 목차를 보듯 한번 훑어보는 것과 같다.
그림자
만약 사회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것, 즉, 그림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조차 신경 쓰지 않는 것들, 그러나 잃고 나면 매우 고통스러워지는 것들, 그 그림자를 소중히 여겨라. 하지만 만약에 그것을 잃었다면, 그리고 회복하기 위해 영혼까지 팔아야 한다면, 남은 운명은 방랑자가 되는 것뿐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가 되면 굳이 그림자가 없어도 된다은 것이다.
재한외국인들이 겪는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 들은 적이 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내 땅에서 발붙이고 사는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체류를 위해 신원증명, 후견인 확보 등 몇 가지 체류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외국인처럼 그림자가 없는 사람도 있고, 있었던 그림자를 잃은 내국인도 있다. 평소 신경 쓰지 않지만 잃고 나면 고통스러워지는 것이다. 이 짜인 판에서 그림자를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살아간다. 방랑자의 고통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그림자를 잃지 않아야 한다.
명함과 노바디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명함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유리 동물원에 갇힌 한 마리 동물처럼 탈출 불가능한 숨 막힘을 호소해볼 데도 없다. 잠시 그림자를 내려놓고 노바디가 되는 모험이 필요하다. 여행지에 도착하는 순간 가슴에 달린 무거운 계급장들을 내려놓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여행자'라는 계급으로 평등하다.
땅 멀미와 재충전
여행은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점에서도 소설과 닮았다. 설렘과 흥분 속에서 낯선 세계로 들어가고, 그 세계를 천천히 알아가다가, 원래 출발했던 지점으로 안전하게 돌아온다. 독자와 여행자 모두 내면의 변화를 겪는다. 그게 무엇인지는 당장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일상으로 복귀할 때가 되어서야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살던 동네가 다르게 보이고 낯설게 느껴진다. 204쪽
땅 멀미라는 말이 있다.
흔들림에 익숙해진 사람에게 찾아오는 낯선 단단함. 206쪽
귀환의 원점은 겨우 찾았지만 그 자신이 이미 변화했기 때문에 원점은 의미를 읾 저버리게 된다. 207쪽
여행을 할 때마다 공통적으로 남는 두 장면이 있다. 여행지에 도착해 숙소에 들어서 여장을 풀 때다. 곧 펼쳐질 낯선 풍경과의 만남에 흥분이 되는 순간이다. 다른 하나는 여행을 마치고 도착해 집안에 들어설 때이다. 무사히 잘 다녀왔다는 안도감이 감싼다.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마치고 온 것 같은 기분이다. 내일까지 종일 침대에서 죽은 듯이 자야 할 것 같은 기분 좋은 피로감이 몰리는 순간이다. 외견상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는 벌써 화학적 변형이 시작되었다. 땅 멀미처럼 단단함으로 맞아주는 익숙한 현실은 삶에 다시 힘찬 시동을 걸게 한다. 마음속에 여행지에서 충전한 에너지로 다시 열정적인 삶을 불사르라고 한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랜 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