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을 보고
초등학교 때 기생충 사진을 처음 보았다. 몸속에서 꿈틀거릴 상상만으로도 소름 끼쳤다. 기생충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간이나 폐에 기생하는 디스토마류가 제일 무서웠다. 기생충은 숙주의 몸에 기생을 하며 숙주와 함께 삶을 마친다. 영화 '기생충'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기생충을 의미하듯 기택, 기우, 기정, 충숙 등 '기', '충'자가 이름에 들어있다.
가장 완벽한 계획이 뭔지 아냐? 무계획이다.
기생충에게는 미래가 없다. 그저 숙주의 운명에 따라 삶이 흘러갈 뿐이다. 기생충들에게 계획이라는 건 일견 사치다. 기택이 아들 기우에게 한 이 말은 오랜 경험에서 체득한 기생충스런 삶의 지혜일까. 지구를 생명체 지구(가이아)라는 시각으로 보면 인류는 가장 심각한 기생충이다. 다른 동물들은 추위나 더위에 적응해가며 산다. 인간은 화석연료를 태우며 환경을 개척하며 산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지구의 자원들을 갉아 편리함과 바꿔왔다.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이 정도로 해를 끼치는 생물은 없다.
'봉테일'이라는 별명처럼 봉준호 감독은 영화 곳곳에 섬세한 장치들을 심어놓았다. 전작 ‘설국열차'에서도 그랬듯이 사회 계층구조가 영화 '기생충'의 배경이다. 기택 가족의 반지하방, 박사장의 저택, 충숙 남편이 숨어든 저택의 지하공간은 짧지 않은 계단들로 연결된다. 카메라는 그 계단을 수직으로 따라가며 계층구조를 시각화했다. 기택의 가솔들이 박 사장 집에서 한바탕 소란을 벌인 후 쏟아지는 폭우 속에 돌아간 보금자리는 물바다를 이뤘다. 변기에서 검은 오수가 역류하는 모습은 사회 구조의 바닥을 채우고 넘쳐 뿜어져 올라오는 '을'들의 분노 같았다.
둘이 똑같은 냄새 나
박사장은 자신의 기사로 일하는 기택에게 '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자신이 그어놓은 선을 을에게 침해당하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는 알게 모르게 이러한 선들이 존재하며 존중된다. 그것은 효율을 위해 그어진 책임과 권한에 대한 상식의 선이다. 그것이 차별적 경계로 작용할 때 선은 벽이 되어 갈등을 낳는다. 영화에서는 냄새가 그 선을 넘나 든다. 박사장의 어린 아들은 기택의 냄새를 맡으며 가정부 충숙에게서 나는 냄새와 같다고 이야기한다. 박사장은 그것을 '무말랭이 썩은 듯한 냄새'와 비슷하다고 아내 연교에게 말한다. 몇 년 전인가 국민을 '개, 돼지'로 언급했던 어느 고위공직자의 엽기스런 멘트가 떠올랐다. 실제로 이런 인식이 을에게는 충격일 수 있으나 갑의 세계에서는 보편적인 공감을 형성하고 있다.
성실한 사람은 태양 아래에서 걸어가면서 자신의 그림자를 잘 간직하는 법이지
혹시 매우 불행하게도 이 세계에서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거짓 그림자를 그려주실 수 있는지요?
영화 속 지하공간의 음습한 냄새를 상상하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떠올랐다. 주인공은 자신의 그림자를 금화가 끊임없이 나오는 주머니를 받고 악마에게 팔아넘긴다. 평소 아무 쓸모도 없을 것 같은 그림자가 막상 사라지자 그는 더 이상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기피대상이 된다. 물질적으로는 얼마든 풍요했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영화에서 을의 공간에는 그림자가 없다. 정원 쪽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은 거실에 기다란 그림자를 만들어주지만 볕이 들지 않는 기택의 집, 문광이 머무는 지하공간엔 그림자 대신 쾨쾨한 냄새가 배어있다.
친구여 자네가 만약 사람들 가운데 살고 싶다면, 부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그림자를 중시하고 그다음에 돈을 중시하라고 가르쳐 주게나 물론 자네가 단지 자기 자신, 그리고 더 나은 자기 자신과 함께 살고 싶다면, 자네에게는 그 어떤 충고도 필요 없겠지만.
기택과 문광은 ‘대왕 카스텔라’라는 체인점을 운영하다가 가세가 기울었다. 사회적 안전망에 보호받지 못해 위험에 노출된 을에게는 착취라는 이름으로 갑의 구조적 기생이 자리한다. 망가진 을은 다시 갑의 그늘로 돌아가 기생충처럼 삶을 이어간다. 서로 물고 물리는 기생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어느 날 기우를 찾아온 민혁을 통해 이야기는 시작된다. 유학을 가는 그를 대신해 기우는 부잣집 고액과외 선생으로 들어간다. 이를 계기로 여동생 기정, 그의 부모 기택과 충숙까지 모두 박사장 집에서 일하게 된다. 기우는 수석을 하나 전달받는다. 수석은 기우에게 욕망과 야망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 꿈과 야망은 충숙과 문광과의 아귀다툼에서 서로를 파멸시키는 도구로 사용된다.
기우와 기정이 비밀번호가 걸려있지 않은 다른 집의 와이파이를 찾는 첫 장면도 인상적이다. 네트워크 사회에서 연결이 끊어지는 것은 배반이자 이단이다. 이단 행위는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이것이 자의적 선택이 아닐 경우 문제는 복잡해진다. 어떤 방법으로든 국가는 최소한의 ‘성원권’을 보장할 수 있는 안전망을 확보해야 한다. 샤미소가 이야기했던 매우 불행하게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그림자를 그려 주어야 한다.
아버지는 계단만 올라오시면 돼요.
영화 속에서 계단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수직적인 계층구조를 상징하는 메타포어다. 가든파티에서 비극적 상황이 벌어진 뒤 기택은 문광이 지냈던 지하공간으로 숨어든다. 문광은 그곳에서 살다 보니 원래부터 여기서 태어난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사회 구조적 부조리가 개인의 책임인가 국가의 책임인가 하는 케케묵은 논쟁이 떠올랐다.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자조 섞인 말은 다음 생까지 쏟아붓는다 해도 극복할 수 없는 계층 간의 구조적 격차를 잘 표현한 말이다. 기우는 답신을 할 수 없는 아버지의 모스부호 불빛을 읽어내고 크게 성공해서 그 저택을 사들이겠다고 결심한다. 그 집에 입주하는 날 지하실의 아버지는 계단만 올라오면 된다고 혼자 말한다. 그러나 을에게 그 계단 한 칸의 높이는 올려다보면 넘사벽이며, 내려다보면 충분히 떨어져 죽을 수 있는 깎아지른 절벽이다. 기우의 품에 들어왔던 수석처럼 실현 불가능한 꿈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