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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마코치 Jul 28. 2019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

'데미안' 북 리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세계의 여러 현상이 그곳에서 오직 한번 서로 교차되며,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는 하나의 점인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8쪽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는 구도자였으며, 아직도 그렇다. 그러나 이제 별을 쳐다보거나 책을 들여다보며 찾지는 않는다. 내 피가 몸속에서 소리 내고 있는 그 가르침을 듣기 시작하고 있다.   8쪽 


똑똑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전혀 가치가 없어. 아무런 가치도 없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날 뿐이야.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건 죄악이지. 자기 자신 안으로 완전히 기어들 수 있어야 해, 거북이처럼.   88쪽



내가 처음으로 접한 불경은 <반야심경>이었다. 270자 구성된 그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를 찾아가는 여행 가이드북’이라고 할 수 있다. 반야심경은 기독교의 주기도문처럼 불자라면 누구나 암송할 정도로 모든 사찰에서 가장 많이 독송된다. 그러나 정작 그 경전 속에는 어떠한 불교의 교리를 찾아볼 수 없다. 설명을 위한 비유적 이야기도 없다. 도덕이나 세상사는 지혜에 대한 언급도 없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나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다다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설명하고 있다. 스님은 반야심경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모든 답은 자신 안에 있다’라고 첨언했다. 그 답을 찾아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이 명상이라고 말했다.


나: 절 밖에는 온통 세상살이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한데, 이렇게 선방에 눈감고 앉아 있는 건 신선놀음 아닌가요?

스님: 외적 우주를 탐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적인 우주를 탐험하는 것도 파이오니아라고 할 수 있어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우주를 탐험해서 얻는 지식만이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나요? 수천 년 동안 많은 내적 파이오니아(부처)들이 기록한 탐험 여행기의 결정체가 바로 이 경전입니다.


당돌한 내 질문에 스님은 그렇게 답했다. 불교적으로 보면 인간의 삶은 큰 의미가 없다. 아니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 삶은 고통이며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작은 불빛들처럼 세상에 명멸할 뿐, 삶은 아무 말이 없다. 우리가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 뿐이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지금 이 곳에 현존한다는 것을 긍정하는 일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성하고 경이로운 것은 자신의 알껍질을 깨고 나와 바로 이 탐험의 여정에 동참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열려있다는 사실이다.         



너의 인생을 결정하는, 네 안에 있는 것은 그걸 벌써 알고 있어. 이걸 알아야 할 것 같아.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야.  116쪽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123쪽


이봐 싱클레어, 우리의 신은 압락사스야. 그런데 그는 신이면서 또 사탄이지. 그 안에 환한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가지고 있어. 압락사스는 자네 생각 그 어느 것에도, 자네 꿈 그 어느 것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147쪽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반야심경에 근거해 명상에 들어가면서 제일 처음 ‘오감’에 대해 인식한다. 소금 간을 하면 식재료의 본래의 맛이 살아나듯이 명상을 하면 감각들을 선명하게 느끼게 된다. 다음 단계는 오감을 느끼는 내 안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감각이 나 자신이라는 동일시에서 벗어나면 보이는 존재다. 그것은 우리 자신보다 지혜롭고 이미 다 알고 있다. 불교에서는 그 존재를 ‘아발로키타 쓰바루: 지켜보는 자’라고 한다. 바로 그 존재를 알아차리고 인식할 때 우리는 알에서 깨어 나와 피안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것을 압락사스라 할 수 있다.      


내 안에 있는 신성, 그것은 선악이 아니며 옳고 그름도, 도덕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비난하지도 칭찬하지도 않는다. 그대로 존재(being)할 뿐이다. 그것은 불변하며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깨어있다. 그것은 궁극의 완성이며 진리이다. 알에서 깨어나지 못한 이 세계는 마음 가는 대로 무언가 이름을 붙이고 규정하고 프레임을 씌운다. 소설의 처음에 등장한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은 바로 그 존재를 말한다. 이따금 뇌리를 스치는 삶에 대한 의문과 갈증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불편한 투쟁을 피해 안락한 알 속에 안주하려 한다. 알껍질은 우리의 의지보다 단단하다.

         

사랑은 간청해서는 안 돼요. 강요해서도 안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안에서 확신에 이르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은 더 이상 끌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끕니다. 싱클레어, 당신의 사랑은 나에게 끌리고 있어요. 언젠가 내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이 나를 끌면, 그러면 내가 갈 겁니다. 나는 선물을 주지는 않겠어요. 쟁취되겠습니다.  200쪽

 

'깨달음은 간청해서는 안 돼요. 강요해서도 안됩니다. 깨달음은 그 자체 안에서 확신에 이르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깨달음은 더 이상 끌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끕니다. 싱클레어, 당신의 깨달음은 나에게 끌리고 있어요. 언젠가 내가 아니라 당신의 깨달음이 나를 끌면, 그러면 내가 갈 겁니다. 나는 선물을 주지는 않겠어요. 쟁취되겠습니다.'

    

싱클레어는 궁극의 피안의 세계로 상징되는 에바 부인을 사모한다. 에바 부인의 말에서 ‘사랑’을 궁극의 완성 ‘깨달음’이라는 말로 바꿔보면, 피안의 세계에 가기 위한 작은 힌트를 주는 듯하다. 우리에게 귀중한 것들은 대부분 눈으로 볼 수 없다. 그 세계는 간절한 의지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알을 깨고 나올 확신의 힘을 갖게 될 때 우리를 끌어 그 문을 활짝 열어준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피안(彼岸)으로 가자, 피안으로 넘어가자, 영원한 깨달음이여...


알을 깨고 나와 탐구를 시작할 그 궁극의 세계로 이끌며 반야심경도 이렇게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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