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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마코치 Aug 13. 2019

인생을 대행해준다면

최근 '60일, 지정 생존자'라는 미니시리즈를 드문드문 보았다. 테러로 대통령이 사망하고 국정에 공백이 생긴다. 유고된 대통령을 대신해 대통령 권한 대행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정치드라마다. 지진희가 주연인 이 시리즈는 키퍼 서덜랜드가 열연했던 미드 '지정 생존자'가 원저작물로 배경만 다를 뿐 내용은 거의 같다. 의도치 않게 이 드라마를 몇 번 본 것은 바로 그 '대행'이라는 설정에 흥미를 느껴서였다. 대행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빈자리를 차 서열자가 대신 맡아 한시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담당자의 공백으로 초래될 수 있는 업무누수를 막기 위해 대행이라는 제도는 합리적이며 유용하다. 그러나 분명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대행이 본래 업무 누수를 방지할 목적으로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고 전제를 하면 지금은 대행 서비스를 다른 이유로 더 많이 이용한다. 대행은 이제 일종의 생활서비스 산업으로 인식되고 있다. 경기 불황으로 취업이 어려워지면서 젊은 구직자들이 유입되어 대행 서비스도 빠르게 성장했다. 잔심부름 대행 서비스가 포털 사이트로 옮겨오면서 온라인을 통해 급격하게 성장했다.


성격을 명확하게 나눌 수는 없지만 대행 서비스는 관계 대행과 편리 대행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회적 체면이나 업무상 필요 때문에 또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관계를 피하고자 역할인을 고용하는 경우가 전자이고. 발레파킹, 장보기 등과 같이 심부름을 대신해주는 경우가 후자이다. 가끔 대행 서비스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다. 대행이라는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계에 대한 상식과 충돌하거나 그것을 넘어설 때이다. 처음엔 놀라웠던 결혼식장 하객 대행도 그럴 수도 있겠다고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부모대행이나 애인대행 같은 것은 관계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넘기 어렵다.


가장 오래된 대행 서비스라고 하면 변호사일 것이다. 의뢰인의 법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복잡한 법무를 처리해주고 수임료를 받는다. 지금은 법무사라고 하지만, 관청 부근에는 ‘대서소’라는 조그마한 구멍가게 같은 영업장들이 성행했다. 세무사나 회계사도 이와 비슷하게 부침을 해왔다. 최근 '퇴사 대행 서비스'가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수년 전에 이미 등장했다.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하기 두려워 사직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다. 대행업체는 의뢰인이 작성한 사표를 대신 내주고 사무실에 남아있는 짐을 찾아 집으로 배송해준다. 의료보험이나 퇴직 증명 등 관련 서류를 대신 받아 의뢰인에게 전달한다. 의뢰인이 일절 회사와 접촉하지 않고 퇴직할 수 있도록 돕는다.


대행 서비스의 미래를 잠시 상상해보았다. 기억 대행, 감정 대행, 영혼 대행 등 추상적이긴 하지만 그 서비스의 영역이 점차 우리의 내밀한 곳까지 파고들지 않을까. 그래서 대행은 새로운 차별적 계급을 만들고 귀찮음과 욕심이 충족된 우리는 더욱 퇴행하지 않을까. ‘인격(personality)’이라는 말은 라틴어 단어 ‘페르소나(persona)’에서 왔다. 페르소나는 ‘가면’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인격이라는 가면을 쓰고 주어진 배역을 소화하면서 살아간다. 부모, 자식, 직업인 등 주어진 역할도 여러 가지다. 우리의 삶 자체가 대행 인생이다. 맡은 배역은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잘하든 서툴든 직접 소화해내야 한다. 여기서는 대행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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