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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마코치 Jul 25. 2021

0. 바보

삶은 시도와 실수이다. 우리는 실수를 통해 배워야 한다.

현명한 황제들은 궁전의 광대로 바보 한 사람을 데리고 있었다. 왜일까? 소위 현명한 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오직 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위 현명한 자들은 황제가 두려워 무언가를 말하는 것을 주저했기 때문이다. 바보는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결과에 상관없이 말한다. 바보는 결과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바보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 바보는 무지한 사람이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 즉 단순한 바보이다.

두 번째 바보는 무지하면서도 자신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복잡한 바보, 학식 있는 바보이다.

세 번째 바보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다. 이는 축복받은 바보이다.


우리는 단순한 바보, 즉 ‘얼간이’로 태어난다. 모든 아이들은 지식의 맛을 보아야만 한다. 무지는 위험하거나 위험 그 자체이다. 지식을 가지면 이에 잘 대처할 수 있기에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많이 알아갈수록 지식이 장애가 되어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삶에서 멀어진다. 지식이 없다면 지옥을 창조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지식이 늘어날수록 ‘똑똑이’가 되고 머리를 통해 살아간다. 첫 번째 바보들은 필연적으로 두 번째 부류의 바보가 된다. 세 번째 바보로의 이동은 너무나 많은 지식을 갖게 되어 그 지식이 극도로 엄청난 부담이 될 때 가능해진다.


모든 아이들이 첫 번째 바보에서 두 번째 바보로 이동하지만, 두 번째 바보 중에 축복받은 소수만이 세 번째로 이동한다. 그들은 소위 축복받은 바보이다. 축복받은 바보들은 지식이 하찮은 것에 불과함을 안다. 그의 눈에는 이론과 생각이 없다. 그의 마음은 바로 지성, 순수 지성이다. 더 이상 빌려 온 지식으로 마음이 어지럽혀지지 않는다. 그는 오직 깨어있다. 그는 자각의 불꽃이다.

- 오쇼 -



현자들은 우리게게 바보처럼 살라고 한다. 그러나 바보가 되라는 의미는 아니다. 예수도 어린 아이와 같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지 아이가 되라고 하진 않았다. 우리는 대부분 두 번째 부류 어디쯤에서 살아간다. 세 번째 부류의 바보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다. 매일의 삶 속에서 세 번째 부류의 바보처럼 살 수 있기를 소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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