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토요일 가을날의 오후였다. 아내는 모임에 나갔고 두 아들도 집에 없었다. 마당에 잡초도 뽑고 다운로드한 영화를 보며 망중한을 보내려던 참이었다. 매제로부터 전화가 왔다. 평소 전화를 거는 일이 없어서 불길한 감이 들었다. '형님! 형님! 놀라지 마시고 들으세요. 아버님이...' 짐작한 대로였다. 애써 감정 누른 목소리로 아버지가 위독하심을 알렸다.(나중에 알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숨을 거두신 뒤였다.) 응급실로 옮기고 조치를 하였으니 절대 운전을 서두르지 말라고 걱정하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취직한 이후 줄곧 강원도에 살았다. 수원에 사시는 부모님은 막내 여동생 내외가 지근거리에서 살면서 모셔왔다. 아버지는 평소 걱정할만한 병인은 없었으나 연로해지면서 기력이 예전만 못하셨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을 미리 생각해본 적이 있어서인지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 나는 꽤나 말썽꾸러기였나 보다. 학교에 가면 나아질까 싶어 어머니가 동사무소 공무원에게 담배 두 갑의 뇌물을 주고 일년 일찍 입학시켰다고 한다. 겁 만고 내성적인 성격이 원 성격인데, 철부지 때는 그렇게 오해를 받았던 것 같다. 주변 지인들은 아버지를 '법 없어도 살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내게는 엄부였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바르게 키우려고 하셨다. 거의 매일 아버지한테 꾸중 듣거나 매를 맞았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이후에 매 맞은 기억은 없다. 시비가 붙어 동네 불량스러운 형들한테 내가 주눅 들어하는 모습을 보신 이후라고 어느 날인가 회고하셨다. 소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와는 어느 정도 마음의 거리를 두고 지냈었다.
아버지의 사망진단서에는 '음식물로 인한 질식'으로 적혀있었다. 응급구조대원들이 아버지가 드시던 떡 조각이 기도를 막았다고 생각을 해서 응급실에 그렇게 보고를 한 것 같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급성 심근 경색으로 돌아가신 것으로 생각된다. 의사인 친구에 따르면 심근경색은 의식을 먼저 잃기 때문에 고통이 거의 없다고 했다. 병치레로 고통을 격다 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지만, 유언 없이 갑작스레 맞은 아버지의 유고에 황망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두 번의 암 선고를 받았다. 한 번은 후두암 또 한 번은 대장암이었다. 힘든 수술을 거쳐 방사선 치료까지 불구의 의지로 이겨내셨다. 어머니의 정성스러운 병시중이 컸다. 방사선 치료로 침샘이 말라 입 안이 건조한 것 말고는 병치레 없이 잘 지내셨다. 심장과 관련한 병변은 한 번도 없었기에 기력이 쇠해서 떠나셨다고 생각되었다.
돌아가시기 몇 해전부터 나는 아버지와 좀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아버지는 역사 드라마를 좋아하셨다. 어느 날인가 아버지랑 단 둘이 영화 ‘사도'를 보러 갔었다. 점심도 같이 먹고 몇 번도 더 들었던 친가의 내력이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무척 즐거워하셨다. 그리고 또 어느 가을날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전주에 놀러 갔었다. 주말을 이용한 길지 않은 여정이었다. 아버지와 같이 같이 갔던 마지막 여행으로 기억한다. 거창한 여행은 아니었지만 아버지 떠나시기 전에 나누었던 몇 가지의 추억이 그나마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