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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마코치 Feb 24. 2019

명상을 해야 하는 이유

좀비적 삶 청산하기

난 좀비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빤한 줄거리에 예측되는 결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빠져들어 보곤 한다. 케이블 TV에서 방영하는 '부산행'을 보면서도 그랬다. 지난 설 연휴엔 킹덤을 보았다. 넷플릭스가 제작한 한국판 고전 좀비물이라고 대대적인 바이럴 마케팅이 소셜미디어에 올라오고 있을 무렵이었다.


좀비물에 빠져서 보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극단적인 비약이겠지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좀비 무리들을 보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일 것 같다. 좀비에게 물어뜯기면 영혼이 털리고 같은 좀비가 된다. 그리고 감각의 반응에 따라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사람들을 공격한다.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명상은 쉽지 않다. 시간과 노력, 자기 규제가 임계치에 이른 후에야 그 신비의 문을 열어준다. 그 문을 열기까지 고리타분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명상을 하려 하는가?


영화에서 답을 찾아본다면, 좀비적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삶에 대한 불만족이 내재되어 있다. 잠시 억누를 수는 있지만 항상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마치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큰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고 있는 시지프스와 같다. 바위가 늘 꼭대기에 있게 하라는 하데스의 명령에 따라 시지프스는 "하늘이 없는 공간, 측량할 길 없는 시간"을 무익한 노동으로 싸우고 있다.


영화와 현실의 차이가 있다면 외관상 우리는 괜찮아 보인다는 점이다. 자신이 속한 다양한 사회에서 적당히 체면 유지하며 그럭저럭 살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가슴속에서 우리를 나락 끝으로 떨어뜨리는 절망과 불안의 순간을 마주한다. 영화 속 좀비는 늘 불안해하거나 긴장해 있다. 외견상 괜찮아 보이는 우리의 내면에는 좀비가 살고 있다. 만성적 긴장, 타인에 대한 자비심 결여, 꽉 막힌 느낌들로 채워져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는 숙명처럼 쉽게 감염되는 질병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이 같은 병증으로부터 도피해왔다. 때론 무시하며, '~하기만 하면'이 전제되는 'If-증후군'으로 문제 인식을 분산시켜왔지만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생각과 인식의 밑바닥에 여전히 흐르고 있다. 파티나 회식에 가보자.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뭔가 신나게 떠들어대지만, 두려움이 깔려 있는 상처 입기 쉬운 목소리들에 귀 기울여보라. 그 긴장감, 압박감을 느껴보라. 아무도 정말로 느긋하지 않다. 그런 척할 뿐이다.


우리가 겪는 체험의 본질은 변화다. 변화는 끊임없이 일어난다. 삶은 순간순간 흘러가니, 하늘 아래 똑같은 것이란 있을 수 없다. 영원한 변형이야말로 인식 차원 우주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에 우리는 체험을 범주화해왔다. 좋다고 생각되는 것은 끊임없이 움켜쥐려 한다. 나쁘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부정하고 없애려 한다. 이도 저도 아니면 무시해버린다. 그 결과 우리는 끊임없이 쾌락을 좇고 가능한 한 고통에서 달아나고자 해왔으며 자신의 체험의 대부분을 무시하면서 쳇바퀴 돌듯 살고 있다.


괴로울 고는 팔리어로 두카(dukkha)라고 한다. 불교사상의 핵심 용어이다. 이는 단순히 몸으로 겪는 고통뿐만 아니라 매 순간 심리 작용의 일부이자 심리 쳇바퀴에서 직접 연원 하는, 깊고 미묘한 불만족을 아우른다. 우리는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평화를 바라지만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피상적인 목표가 근본적인 목적을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 추구하는 것은 욕구가 아니라 욕구가 채워졌을 때 찾아오는 평안이다. 욕구가 목적이 되면 평안이 가려진다.


우리는 존재의 깊은 정서적, 영적 측면을 희생하면서 물질적 측면을 과도하게 개발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오류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삶의 유형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먼저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정확히 보아야 한다. 어떤 종류의 환상이나 판단, 거부감 없이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상태인지 볼 수 있어야 한다.


명상은 마음을 정화시켜준다. 마음을 평정과 자각의 상태, 집중과 통찰의 상태로 이끈다. 냇물에 돌을 던져보라. 흐르는 물에 돌의 표면이 다듬어질지 몰라도 내면은 변하지 않는다. 같은 돌을 용광로 화염 속에 던져 넣어보라. 돌 전체가 안팎으로 완전히 녹아 변한다. 이렇듯 문명은 인간의 외면만을 바꾸지만 명상은 인간의 내면을 완전히 융해한다.


명상은 희망이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융해되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과정이다. 우리가 명상을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좀비로 살 것인가? 존재 본연의 모습을 찾을 것인가?




<참고문헌>

헤네폴라 구나라타나 스님(2001), 손혜숙 옮김. 위빠사나 명상. 아름드리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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