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뻬의 행복 탐험
<꾸뻬 씨의 행복여행>을 읽고 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해 정신과 의사 꾸뻬는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통해 마주치는 행복에 대한 기록한 단상은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 깨달아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행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녁을 먹으면서 작은 아들에게 물었다.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니?', '자신이 원하는 것들이 충족된 상태 아닐까?'로 대화는 시작되었다.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우리의 욕망은 점점 커졌다.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마음이 생겨났고 정신적으로 피폐됐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된 대가로 정신적인 불만족을 비용으로 지불하고 있다. 행복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이라는 전제로 아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원시시대에는 생존을 위한 일차적 욕구 충족을 위해 행복에 대해 이야기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물질적으로 충족되는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행복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이라고 예를 들었다. 한마디로 등 따시고 배부른 이야기라는 거다. 삶이 고단하면 행복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있겠느냐는 논지를 편다. 아들의 이야기를 극단적으로 요약했는지 모르겠으나 풍요가 주는 행복에 일정 부분 상대적 비용 지불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왜 모든 것을 갖고 있고 많은 행운을 누리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 정신과 의사가 더 많은 걸까?
첫 번째 원인은 사람들이 행복을 목표라고 믿는 데 있오!
꾸뻬가 어느 노승으로부터 들은 행복에 대한 배움이다. 우리는 행복해지길 원한다.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우리는 현재를 저당 잡힌다. 우리의 행복은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이다. '마시멜로 실험'은 미래지향적인 행복추구에 합리적 근거로 주장될 수도 있다. 지금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인내했던 아이들이 성장한 뒤 더 큰 성취를 이룬다는 것이 이 실험의 요지다.
조건을 조금 극단적으로 바꿔보자. 지금은 점심식사시간이고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 배고픔을 참고 밥을 거른다면 저녁식사 때는 좋아하는 요리를 마음껏 먹게 해 주겠다고 해보자. 배고픔을 못 참고 먹은 아이와 배고픔을 견디고 자신이 원하는 맛있는 음식을 쟁취한 아이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의 모습은 마치 후자의 아이 같은 모습이 아닐까? 미래의 행복을 얻는 대가로 현재의 행복을 지불하고 있다. 마시맬로는 안 먹어도 괜찮지만 끼니를 저당 잡힐 수는 없다.
한 달 후 먹을 진수성찬 때문에 식사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오 년 후 누릴 장밋빛 계획 때문에 매일의 귀한 것들을 우리는 쉽게 거른다. 때맞춰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한다. 그것은 하루하루 시간 속에 박혀있다. 제때에 공급받지 않으면 마음은 불행이라는 영양실조에 빠진다.
대체로 옷을 잘 차려입은 이런 사람들,
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그다지 만족해하지 않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어떤 것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허기 진 사람들로 거리는 분주하다. 말쑥한 옷차림 속에 불만족의 허기가 감춰져 있다. 만성적인 이 허기가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입고 있는 사회적인 옷들은 허름한 속내를 감춰준다. 어리섞은 자는 그 옷이 영원히 제옷인줄 알고 산다. 그다음은 제옷이 벗겨지는 날을 준비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옷을 입고 있는 동안 멋진 몸매를 가꿀 수 있다면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는 옷과 상관없이 자기 분량의 행복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다. 가면 같은 옷들이 벗겨졌을 때 행복 속에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이 불행에게 적용된다면 행복에도 적용될 수 있다. 불행이 목표가 아니듯이 행복도 목표가 될 수 없다. 항상 불행한 인생은 없다. 항상 행복한 인생도 없다. 강물은 맑음과 탁함을 따지지 않고 오롯이 흘러갈 뿐이다. 행복과 불행도 마찬가지로 그저 흘러간다. 우리 마음이 불행으로 또는 행복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