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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급 발견

영어공부 한 번 안 해본 사람 있니?

by 타마코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영어공부 이력이라면 아마도 군대 다음으로 이야깃거리가 많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중학시절 TV 프로그램을 통해서 처음으로 영어공부에 흥미를 갖었다. 팝송 가사를 음미하며 시작된 관심이 점차 커졌다. 이른 아침에 방송되던 '민병철 생활영어'라는TV 프로그램이었다. 민병철 씨와 론 실버라는 남자, 제니퍼라는 여자 출연자가 등장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제니퍼는 주한 미국영사의 부인이었다. 그녀의 미모 때문인지 프로그램은 당시에 꽤나 인기가 있었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방송을 녹음해 반복적으로 따라 했다. 서울 정동 스튜디오에서 한 두 달치를 몰아서 녹화했는데 집에서 가까워 이따금 방청하곤 했다. 어른들 틈에 끼어 있는 중학생이 대견했는지 열심히 하라는 격려도 많이 받았다. 그때 외웠던 표현들이 아직도 뇌리에 박혀있다.


중학교 때 교내 영어 말하기 대회에 참가했다. 영어수업시간에 선생님의 지목에 따라 얼떨결에 이루어졌다. 얇은 영어 문고 책의 한 챕터를 달달 외워서 올라갔다. 얼마나 긴장이 되었던지.. 학창 시절 전교생 앞에 나섰던 몇 안 되는 기억이다. "Echo was a nymph... "로 시작된 에코와 나르시서스의 이야기를 외웠다. 좋은 성적은 거두지 못했지만 영어공부에 더욱 흥미를 갖게 되었다.


고등학교의 영어 공부는 재미없었다. 도식화된 문법에 시험 위주의 공부가 괴로웠다. 흥미를 잃어버린 내게 영어는 입시를 위해 넘어야 할 교과목일 뿐이었다. 꾸역꾸역 공부했다. 대학에 가서도 'vocabulary 22,000' 같은 책을 보며 목적 없이 공부했다. 무슨 의미가 있었나 싶었다.


본격적으로 영어공부에 다시 흥미를 갖게 된 것은 군 제대 후였다. 동문 선배와 종로의 유명 어학원에 토플 강좌를 들었다. 수강생도 몇 없었고 재미도 없었다. 그런데 앞 교실은 강의실이 미여 터지고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수업하는 교실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호기심에 끌려 그 수업을 수강하게 되었다.


선생님의 수업방식은 독특했다. 수업 참여를 위해서 필수 문구가 있어야 했다. 12색 형광펜 세트, 12색 칼라 볼펜, 다양한 모양이 파여있는 노란색 로트링 제도용 자, 단어카드. 오자마자 앞으로 불러내 자기소개를 시켰다. 영어든 국어든 일어든 상관없었다. 알고 보니 수업시간에 수시로 앞으로 불러내 짧게 발표를 시켰고 그럴 때마다 수강자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종교집회 같은 분위기가 적응이 안되었다. 나는 좀 더 지켜보며 적응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간혹 견디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 달이 넘어갈 무렵 수업 중에 한 친구가 벌떡 일어나 언성을 높였다. 수업을 듣기 시작한 지 며칠 안된 수강생이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내가 그 딴 개똥철학 들으려고 이 새벽에 여기 앉아 있는 거 아닙니다. 영어공부를 하러 왔다구요", "........" 강의실은 순간 정적이 흘렀다. 정적 끝에 선생님은 "앞으로 나오세요. 네, 죄송합니다." 하시더니 주머니에서 수강료만큼의 돈을 꺼내 주었다. 분을 삭이지 못한 그 청년은 돈을 받아 들고나갔다.


선생님은 학원 내에서 최우수 강사였다. 수강생이 가장 많았고 그만큼 적들도 많았다. 시기에 찬 다른 선생님들은 그의 교육방식에 사사건건 문제를 제기했다. 심지어 자기 수강생들에게 험담을 하며 선생님을 흉봤다. 선생님의 수업방식은 오해의 소지도 있었다. 진도도 신경 쓰지 않고 바른 삶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한 시간에 서너 문장 공부했던 게 최다 진도였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형광펜으로 각 단어를 요소별로 표시해 구문론처럼 도식화했다. 그려진 색깔만 보면 문장 구조가 한눈에 파악된다. 그렇게 하고 나서 입에 붙을 때까지 음독을 반복한다. 혼자 한 번, 왼쪽 사람과 눈 마주치면서 한 번, 그렇게 사방의 사람들과 한 번 씩 큰 소리로 따라 읽어야 한다.


점심을 먹으며 선생님께 돈을 받아 들고나간 청년에 대해 여쭤보았다. "지가 영어 공부를 하러 내게 왔으면 내 노하우대로 따라야 하고, 자기 생각과 안 맞으면 다른 선택을 하는 거지." 명료하게 답변하셨다. 자신의 영어학습법에 대한 철학도 덧붙이셨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영어를 할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주려 하셨다. 영어 공부할 그릇이 만들어지면 영어가 단박에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잘 만들어진 바가지로 물을 퍼담는 것처럼 쉬운 일이라고 하셨다.


사실 이것은 영어학습을 넘어 삶의 모든 것들에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선생님은 단어나 문장 몇 개 보다 큰 비전을 가지고 가르치고 계셨다. 학원을 다녔던 친구들 중에 몇몇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의 꿈과 잠재력을 발견하였다. 비록 학원이었지만 내가 만났던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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